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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Phyllis Kim 칼럼

최소한의 예의

 

구순 생신  몇 일 후 대구에서 산책하는 이용수 선생

2020년 5월 25일 이용수 선생 기자회견 후 일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자를 지지한다는 네티즌들 똥물 만난 구더기처럼 광분하고 있다.

윤미향 당선자의 기자회견이 있었던 5월 29일 이용수 선생에 관한 22년 전 기사에 야유와 조롱이 섞인 저열한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정작 기사 자체는 "둘 다 전쟁의 희생양으로 죽어갈 처지라는 동병상련의 마음"이 통했던 일본인 장교에 대한 회상으로 타이완 위안소 있던 자리를 방문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저열한 악플이 물론 정대협/정의연 활동가들의 뜻은 아니겠지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모두 고뇌하고 성찰할 문제이다. 미국 <'위안부' 행동>(전 가주한미포럼)의 김현정 대표가 참지 못하고 페북에 글을 썼다. (편집자 주)

 

 

 

 


글: 김현정 (Phyllis Kim)


위령제였나 영혼결혼식이었나... 할머니를 향한 공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한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개인의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예를 들면 일본군 성노예제 또는 흑인 노예제 같은) 엄청난 시스템적 권력을 바탕으로 장기간동안 이루어지는 폭압적인 인권침해의 피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기보호 기제를 발휘하게 됩니다.

 

자신이 매일 매일 당하고 있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는 건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디기 힘든 일이라서, 그런 경우 대개 자살을 하거나 마약(일본군이 아편을 위안부에게 주입한 사실은 증언에서 확인됩니다)에 취해 정신줄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의 존재가치를 어떤 방식으로든 인정받아야 하며, 연락도 닿지 않는 가족이 그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가해자 편에 서서 가해자가 가진 권력 안에 안도하거나, 가해자와 사랑에 빠지는 현상도 종종 나타납니다.

 

심리학에서는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장기간 가정폭력에 노출된 피해자가 가해자를 사랑한다며 처벌을 원치 않는 경우를 요즈음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경우, 집에서 귀한 고명딸이었고, 멋도 모르고 대만까지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끌려갔을 때 극심한 혼란상태에 있었을 것이라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라는 질문을 하는 것조차 너무나 감당하기 어렵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극심한 불안감과 무기력감에 모든 논리적 사고를 중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위안소에 도착했을 때, 군인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극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죽을 뻔한 할머니를 살려낸 것이 그 일본군인이었습니다.

 

비록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끌려갈 당시 15세였고, 조선이 식민지인지 뭔지, 전쟁이 났는지, 누가 전쟁을 하는지, 이런 것도 전혀 모르는 시골처녀였습니다) "너는 너무 어리다"며 자신을 동정해 주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애써 준 젊은 장교에게 심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생명의 은인이었던 그 군인은 할머니에게 친절하게 대했고 사랑의 감정이 싹텄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날 찾아와 이제 내일이면 나는 죽으러 간다며, "전투기는 뜨는데 대만은 멀어져간다...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은 ooo (그 군인이 지어준 이용수 할머니의 일본식 이름)뿐..."이라는 노래를 가르쳐 주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나중에 그 노래 덕분에 자신이 잡혀있던 곳이 어디였는지를 알아내서, 대만에 가서 그 군인의 실명과 그가 가미가제 대원으로 출동해서 전사한 날짜까지 확인합니다.

 

할머니가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신랑신부 두개의 인형을 바다에 띄웠을 때 신랑 인형에는 그 군인의 이름을, 신부 인형에는 "무명씨"라고 적었지만, 어쩌면 할머니는 이용수라는 이름을 적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본 군인과 영혼 결혼식이라니!! 저 할매가 노망이 났군!" 이런 비난을 받을까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그런 것까지 할머니께 여쭈어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 상처를 후벼파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일본군인이었지만 그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족을 그리워하고, 조선에서 성노예로 멋모르고 끌려온 소녀를 동정하고 그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건 그냥 인간적인 일이었고, 그런 그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용수 할머니가 계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물론 저도 할머니 통역을 하다가 처음 그 얘기를 듣고 너무나 당황했었습니다. 하지만 차츰 배워갔습니다. 할머니가 지옥의 끝에서 자신에게 인간적인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가 일본 군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할머니를 친일파나 매국노로 모는 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일입니다.

 

우리가 뭉뚱그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라 부르는 그 분들... 여러분 한 분 한 분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삶이 있고, 가족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세상 누구보다도 감추고 싶은 깊은 상처가 있는 분들입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할머니가 그 고통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극복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감히 그 고통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오셔서 수많은 이방인들 앞에 서서 본인의 상처를 내보이시고 증언을 하실 때,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기억들은 조금 감추고,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기억을 드러내신다고 해서 누가 할머니께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20.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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