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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첫 소녀상 이야기

(2) 그놈의 오지랖

'오지랖'이란 말은 어원상으로 보면 남의 일에 참견하거나 개입하기 좋아한다는 뜻으로 부정적으로 쓰였으나 오늘날은 자기 비판의 기제로 쓰이곤 한다. 내가 꼭 그 일에 참여했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고민 앞에 쓸 때 다시는 오지랖 부리지 말자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오지랖이 없으면 배움도 없니 않겠나 싶다. 내가 소녀상 일에 참여하게 된 과정은 오지랖이었을까 배우는 과정이었을까. 

2016년 여름은 무척 바쁜 시간이었다. 2010년부터 내기 시작한 월간지도 궤도에 오르고 있었고 당시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낸 독일어 강습소도 방학이지만 수업이 가득했다. 봄에 어떤 지인이 소개해 준 국내 아티스트 그룹 일은 시간이 도저히 되지 않아 중단했다. 소개해 준 지인은 일을 보아주고 신문사에 도움이 되도록 얼마를 받으면 좋지 않겠냐는 좋은 뜻이었지만 각자 생각하는 상상의 범위가 너무 달랐다.

 

국내 있는 사람들은 몇 일 안에 공연장을 구해 준 것이라든가 이런저런 잡일을 해 주는 것에 대해서는 돈을 줄 것이니까 당연하다는 태도였지만 나로서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아예 돈을 받지 않고 정으로 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일단 돈을 받기로 한 이상은 앞뒤가 맞아야 했다. 아니면 서로 사정을 봐 주는 사이라는 관계가 인정되든지 하면 좋은데 그것도 아니고 ...... 국내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너무 많은 시간의 간격이 존재했다. 독일 안에서도 내가 하는 일의 성격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니까 굳이 국내 사람들 탓할 일은 없을 수도 있겠다. 결국 이제는 오지랍은 그만하자고 마음을 굳게 먹고 일을 끊었다. 물론 소개해 준 극장과 아르바이트생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감리교 소속 이주현 목사님이 보내온 메일은 쉽게 거절을 할 수 없었다. 목사가 보낸 메일인데 거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냥한 말투도 그러하며 나 개인적으로도 몇 년 전 한국에 처음으로 소녀상이 섰을 때 신문에 보도를 하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독일에 세우면 어떨까 막연히 생각해 본 터였다. 그런데 이미 수원 시장과 프라이부르크 시장 사이에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난 데다가 수원 시의원까지 만나고 왔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 목사님이 나를 소개 받은 과정도 큰 작용을 하였다. 독일에 오래 계시다 귀국한 S 목사님과 함께 하는 모임에서 S 목사님을 만났다가 독일에서 서포터 해 줄 만한 사람으로 나를 소개받았다는 사실이다. S 목사님은 실로 몇 번 뵙지 않은 분이지만 존경심을 자아내는 분이었다. 처음 뵈었을 때는 그 분이 아직 독일에 계실 때 독일 내 한인교회 협의회 연합 수양회 당시였다. 그때 그 분이 조별 모임에서 말씀하신 '십자가'의 의미, 누구에게나 자신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이 뇌리에 박혀서 몇 년이 지나도록 지워지기는 커녕 내게 큰 화두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 조별 모임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부지런히 참석한 것도 아니고 잠시 참석한 데다가 그 목사님이 나를 기억할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분이 날 기억할 만한 자리는, 지금은 고인이 된 이영빈 목사님의 저서 '경계선'의 독일어판 출판기념회 겸 티타임이 있던 날 뵌 것이 전부였다. 그날 그분에게 신문 얘기를 하고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고 얼마 후 신문을 한국으로 보내 드린 게 인연이 되었을 것이다. 티타임한 날은 총영사배 배구대회 하는 날이었는데 고기 굽는 일 도우다가 고기굽는 냄새 푹푹 풍기면서 별스럽게 달려간 일이 그런 인연으로 이어질 줄이야.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음악인 L씨가 떠올랐다. 당시 내가 내던 신문 풍경에도 종종 글을 쓰는 분이었다. 전화 통화만 몇 번 한 사이였지만 글투라든가 말투 모두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중심으로 서포터 그룹을 엮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화를 해 보았다. 전화 통화가 되지 않았다.

 

하이델베르크 있는 S 목사님과는 바로 통화가 되었다. 하이델베르크 계신 S 목사님은 한국에서 손님이 오실 때면 종종 내가 손님들 일정에 하이델베르크 계신 S 목사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김진숙 크레인 농성 사건 때는 S 목사님의 소개로 그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사이트에 독일어 문건을 올린 적도 있었다. 당연히 S 목사님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셨다. 그리고 사귄지 얼마 되지 않는 화가 K씨와도 통화했다. K씨도 함께 일하기로 했다. K씨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L씨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렁저렁 몇 일이 지나는 동안 수원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프라이부르크에 L씨란 분이 있는데 그 분과 연락하여 서포터를 함께 구성하라는 것 아닌가? 이 또한 왠 우연의 일치란 말인가? 내가 몇 일 전부터 목노아 전화연결을 시도하던 그 L씨가 바로 그 L씨라니......

 

이런 저런 우연이 겹치면서 마음은 서서히 이 일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몇 주가 지나서야 프라이부르크 L씨와 드디어 연락이 되었다. L씨에게 일을 함께하자고 했다. 그런데 L씨는 자기는 이 일을 함께할 수 없다고만 하며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10월이 되어냐 얘기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만한 사정이 있나보다고 생각했다. 

 

수원측에서는 베를린에 있는 H씨에게도 연락이 갔다는 소식을 여러 루트를 통해 전해 들었다. 베를린에 있는 왕언니 두 분이랑 K협의회에서 '위안부' 소모임을 꾸리고 있는 사람이다. 몇 년 전에 그 일을 늘 하던 언니의 이름과 함께 보도자료에 연락처 이름이 오른 것을 처음 보았을 때 참 반가웠던 기억이 있었다.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일에 열심히 하는 사람이므로 이 사람과도 연락이 되어야 했다. 소식이 잘 닿지 않았다.

 

그러던 중 연합뉴스에 기사가 실렸다. 수원 시장과 프라이부르크 시작이 두 손을 잡고 만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바로 이 기사가 실리면서 일본측에서는 바짝 신경을 쓰면서 방해 공작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8월 12일 첫 메일 이후 정작 중요한 현지 프라이부르크 사람이랑 겨우 연락이 되었을 때였다. 그런데 일본 대사가 프라이부르크 시청을 찾아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수원의 집행부에서는 중남부 차원의 서포터 그룹이 아니라 전국구로 꾸리자고 했다. 나도 이에 따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단체들의 대표나 또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아티스트들과 신문 독자들 중 이 일에 관심 가질 만한 분들에게 의향을 묻는 일을 시작했다.

 

하이벨베르크의 S 목사님께는 일본 공관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알려 드렸다. 목사님은 프라이부르크 시청의 담당자가 누구인지 알려달라고 하셨다. 이를 알기 위해 수원 집행부에 문의를 하였으나 수원에서는 알지 못했다. 그 사이 함께 일하기로 한 H 또한 알지 못했다.

 

건립식은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로 정해져 있다고 하니 아직 시간은 넉넉하게 여겨졌고 국내에서는 프라이부르크 한인회와도 연결되고 싶어 했지만 당시로서는 한인회 조직이 이런 일에 나서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프라이부르크 한인회는 사실상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일본 공관이 움직인다는 소식, 메일폭탄이 쌓인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하이델베르크 S 목사님이 알고 싶어하는, 프라이부르크 시청의 담당자가 누구인지도 아무로 말해 주지 않았다. 수원에서도 프라이부르크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모른다고 했다. 

 

H와는 9월 중순 좀 지난 토요일에 오래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 일을 하자는 데 대한 동의를 받는데 여러 시간 통화를 해야 했다. H는 남아 있는 9월 두 주는 휴가를 가야 하고 10월 첫 두 주는 통역 일정이 있어서 일을 같이 할 수 없다고 했다. 독일로 올 소녀상에 부착할 비문 내용이 메일로 왔다. H가 나보다 독일어를 잘 할 것 같아서 제안했지만 H는 시간이 없다고 잘라서 회신을 보내 왔다. 소녀상의 배경과 소녀상의 상징에 대한 최초의 독일어 번역이 시작되었다.

 

그놈의 오지랖이 또 발동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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