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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60년대 동백림 사건 이래 최대 스캔들

60년대 동백림 사건 이래 최대 스캔들
전기요금 난방요금 못 내어서 풍지박산 위기에 처한 베를린 윤이상 기념관

윤이상평화재단 관리 없이 현지조달하는 독일인 음악가들도 한계상황

 

 

 

 

 

YUN Haus

 

세계적 음악가일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멋진 사람으로 기억되는 윤이상 선생이 살던 베를린 클라도의 집은 서거 13년 후 2008년 국내에 자리한 윤이상 평화재단이 사들였다. 그러나 이 집이 계속 보존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스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현재 기념관을 관리하는 슈파러 국제윤이상협회 사무국장이 기념과 관리를 그만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백림 사건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납치극이지만 이번 사건은 윤이상 음악이 곳곳에서 울리고 있는 상황에서 윤이상 생전에 살던 저택이 기념관으로 된 후 관리비를 못 내 풍지박산 될 수도 있는 상황에 가까이 가고 있으니 이러한 스캔들이야 말로 더더욱 가볍지 않은 스캔들이라 하겠다.

 

윤이상 기념관 주인 윤이상평화재단과
베를린 현지 관리인 슈파러 국장

 

국내 윤이상 평화재단은 윤이상 선생의 음악정신을 기리고 그의 음악세계를 보존계승하며 연구하는 한편 윤이상 평화상과 작곡상을 제정하는 등 원대한 꿈을 안고 2005년 3월 18일 출범했다.


그러나 슈파러 국장에 따르면, 최소한 백만 유로를 예치하고 원금을 전혀 축내지 않는 상태에서 유급 상설직원을 두어야 하는 독일의 재단 설립 관련법에 대한 상식으로 볼 때 평화재단은 애시당초 재정적으로 미미한 상태에서 출범했다.  윤이상평화재단이 2008년에 윤이상 선생 집을 사들일 때는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집을 사들였으나 윤이상평화재단이 지불하여야 할 부분은 완불하지 못했다. 기념관으로 수리하는 과정에서도 수리비 지불이 지체되어 곤란한 상황이 계속되었는데 2011년 9월 개관한 이래 아예 일체의 관리비를 보내오지 않아 관리인이 슈파러 국장이 직접 현지조달을 해야 하는 형편이라는 것.


윤이상 선생 생전에 함께 작업을 하고 윤이상 음악에 대한 해설에서는 제1의 권위자이며 1996년에 창립한 국제윤이상협회의 사무국장인 슈파러 국장은 수리비가 모자라 중단한 부분을 직접 단장하기도 하며 하우스마이스터 같은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내부를 새롭게 꾸미고 유품 전시를 하고 음악가의 생애를 잘 정리하여 연보를 만들었다. 기념관이 윤이상의 유품을 보관 전시하는 차원을 넘어 악보와 관련 문서 등을 보존하며 연구자와 일반방문객에게 선생의 음악세계를 접하게 하며 더나아가 동서양의 음악을 만나게 한 작곡가의 업적에 걸맞게 동서음악의 만남의 장과 관련 토론마당이 되게 하는 등 전망이 풍성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더이상 이런 상태로 버틸 수 없다는 것이 슈파러 국장이 한숨짓는 이유다.


전기요금도 내지 못하는 평화재단
무슨 사연이 있을까

 

슈파러 국장에 따르면 윤이상평화재단은 재정이 튼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명박 정부 출범 후 후원금 조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살던 집을 구입하는 비용을 정부가 지원한 것은 이미 2007년에 통과된 금액이었다는 것이다.


윤이상평화재단은 한 때 이명박에서 명진 스님까지 두루 참여했다. 이 중 16명이 대표발기인인데, 조갑제 닷컴을 인용한 블로거에 따르면 그 중 박원순 현 서울시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을 비롯한 8명이 재단 홈페이지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게다가 10월 29일 현재 11월호 편집마감을 앞둔 시간 윤이상 평화재단 누리집 www.yunisang.org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국내 경기도 안양에 문의한 결과 누리집에 문제가 있어 수리중이라고 회신했다. 윤이상 음악상을 관장하는 홈페이지 www.yunmusicprize.org는 10월 29일 현재 선생의 생애와 디스코그라피를 소개하는 난이 링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운영되고 있다.


윤이상음악상은 국제윤이상협회와 윤이상평화재단이 공동주최하는 음악상이며 대상 1인과 특별상 1인이 선정된다. 대상은 정부가 지원하는 미화 2만불이 수여되며 특별상은 그 해 후원기업이나 단체에서 지원하는 미화 1만불이 수여된다. 2007년부터 2년에 한 번 열리고 있다. 2007년에는 BMW 가 후원하여 BMW 특별상이라 하였고 2009년에는 경상남도가 후원했다. 윤이상평화재단 사무국에 따르면, 내년 2013년에 열릴 윤이상음악상의 특별상 후원자는 10월 30일 현재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낯뜨거운 반공트라우마 혹은
음악적 인간적 애정과 존경

 

음악을 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이곳 서구는 물론, 한때 윤이상의 공연이 금지되었던 한국에까지 윤이상 선생의 음악적 업적에 대해서 동양의 가락과 내면의 풍경을 서구 음악에 접목한 천재성과 독자성에 대해 감탄을 하지만 윤이상이란 이름은 아직 한국의 한 구석에서는 60년대 동백림사건의 썩은 기운이 습격하며 부관참시에 버금가는 명예살인을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2008년부터 윤이상평화재단이 북과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 조사를 한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느니만큼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인정하건 하지 않건 상관 없이 한국적인 정서에서는 윤이상평화재단을 위해 후원이라든가 적극적으로 나서기에 곤란한 상황이란 점은 누가 보아도 짐작하고 남는다. 1980년 학살주범 전두환을 26년 후 암살하는 모티브의 강풀 만화가 영화 '26년'으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후원금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제작이 수 년 미루어졌다는 이야기가 우놀날 우리 문화의 현주소를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작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독일에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오길남씨가 펼친 낯뜨거운 반공반북트라우마와 관보를 관보를 통한 선전, 그런 행사에 대사관 직원이 배석한 사실은 오길남의 반공반북공연이 자유주의사회에서 흔히 있는 개인단독행위는 아니라는  점을 반증한다. 오길남은 경제학 박사로서 1985년에 가족과 함께 입북한 인물이다. 이듬해 탈북하여서는 독일에서 6-7년 떠돌다 1992년 남한으로 입국한 후 깜짝 발표하길 윤이상 선생이 자신을 북으로 가라고 꼬드겼다는 것이다. 당시 윤 선생은 편지를 내어 오길남의 주장을 즉각 허위라고 증언하여 반박하였으나 지난 해 오길남 사건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통영의 딸'을 구해내는 것이 목적인지 저승의 윤 선생을 불러내는 것이 목적인지 모를 반윤 세미나는 국제윤이상협회의 조직적인 대응이 있은 후 최소한 독일에서는 수그러들었다. 슈파러 국장이 앞장선 오길남 소동 대응작전은 한번만 더 그러면 법원에 고발하겠다는 강력한 경고와 함께 국제윤이상협회 운영진 사람들은 독일인 음악가들로서 당시 각 개인이 보고 느낀 윤이상 선생에 대한 음악적 인간적 존경심을 담아 윤이상 선생의 평화 사상을 강조했다. 그것도 성명서 하나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개인이 음악적 인간적 교류를 바탕으로 쓴 마음에서 우러난 글이었다.


지난 5년 역사의 뒤안길에서 강하게 불어오는 반공반북트라우마가 윤이상평화재단의 후원조직과 활동에 어려운 여건을 조성한다 하더라도 국제윤이상협회 음악가들이 지난 해에 보여준 단호한 태도에 비하면 윤이상평화재단의 현재 태도는 어떠한가?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선생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인가? 아니면 낳기만 하고 버린 음악가인가? 아니면 이용할 것은 이용하는 대상인가?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 선생을 납치하여 간첩혐의를 씌웠다가 국가망신 톡톡히 당하고 다시 독일로 돌려보냈다. 독일로 돌아와서 뮌헨 올림픽 당시 발표한 윤이상 오페라 '심청전'은 윤이상이 금기시된 1972년에도 문학사상 창간호에 윤이상 이름과 함께 그 대본이 실렸다.


오길남 핑게 사건이 있었던 1992년에서 2년밖에 지나지 않아 윤이상 선생의 작품이 국내에서 공연되었다. 1994년에 30년만의 해금이라 하여 '광주여 영원하라'를 비롯하여 윤이상 선생의 곡이 연주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작고하기 전, 현해탄 건너 일본땅에서 마지막 작품 ‘화염 속의 천사’를 공연하고선 꿈에도 그리었을 고향땅을 지척에 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귀국을 앞두고 과거를 반성하라는 조건을 달아 이를 거부하는 윤 선생에게 살아 한 번 더 고향땅을 밟을 기회를 박탈했다.


비로소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에 윤 선생은 복권이 되었고 선생의 유족들도 고인의 사상을 받들어 윤이상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데 동의를 하였다. 그가 세상을 뜬 지 10년 되는 해에 윤이상평화재단이 출범한 것이다. 

 
다시 윤이상평화재단
정말 전기요금도 못 낼 정도일까?

 

전기요금 가스요금 관리비 모두 한달에 1천 유로 미만이다. 그러니까 통상유지비가 백만 원 가량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요금을 가난해서 못 낸다고 해 버린다면 백만 원 가량 되는 유지비를 지출하지 않는 재단은 윤이상 기념사업을 떠들 자격이 되는 것인가? 게다가 베를린의 윤이상 기념관의 존재를 윤이상평화재단이
베를린 윤이상 기념관이 풍전등화의 운명 앞에 놓여 있는 시간에 올해 9월에는 서울에서 윤이상과 한스 첸더 음악으로 음악회를 하며 독일 지휘자를 초빙하였으니 윤이상의 음악유산을 지키고 계승할 의지가 없는 사회 속에서 소비재 윤이상을 재생산할 돈은 있고 살던 집 개조하여 만든 기념관 전기요금과 난방요금 낼 돈은 없단 말인가?


베를린의 윤이상 기념관을 현재 관리인이 손을 놓게 되고 현지인들이 더이상 조달하지 않으면 청구서는 윤이상 평화재단으로 날아가게 되어 있다. 윤이상 평화재단에서 그래도 지불하지 않으면 기념관은 차압에 들어가고 집달리의 방문을 받게 된다.


윤이상평화재단이 얼마나 이명박정권에서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껏 문화분야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을 생각할 때 윤이상평화재단에 대한 대북관계 조사는 그 조사행위 자체만으로 평화재단에 대한 후원을 어렵게 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하여 현재 상태의 모든 책임을 정부에 떠맡기는 것 또한 윤이상평화재단에게 어울리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명박 정권 하에 일어나는 괴이한 사건들이 많다 하더라도, 고난을 당하면서도 고향을 다시 밟지 못하면서까지 소신을 지킨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재단이니만큼 좀더 단호한 태도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것을 누구나 기대하게 된다.


위대한 사람을 팔아먹기는 쉽지만 위대한 사람의 업적과 정신을 보존 계승하는 일은 어렵다. 그것은 선생의 삶과 음악의 흔적이 어린 집 윤이상 기념관(YUN-HAUS)을 집달리에게 넘겨주지 않고 최소한의 보존이라도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데서 윤이상평화재단의 존재이유가 검증될 것이다. 

 

 

윤이상 선생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누리집

국제윤이상협회: www.yun-gesellschaft.de  (1996년 창립, 베를린 소재),
윤이상평화재단 www..isangyun.org (2005년 창립) (경기도 소재, 현재 접속불가, 수리 중이라 함)
윤이상음악상 http://yunmusicpriz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