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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쉬잇! 느리게 느리게 가능한 한 느리게

쉬잇! 느리게 느리게 가능한 한 느리게
존 케이지 탄생 백 주년, 4.33미터 구간 이색 자전거 대회  

 

쉽게 이해하려면 무척 가깝게 와 있는 것이 현대음악이기도 하다.

존 케이지가 쓴 4분33초를 이해하는 것이나 '가능하면 가장 느리게 (as slow as possible: ASLSP)를 이해하는 방법이 그러하다. 상식으로 기대하는 음악세계와 다른 무엇을 만나는 것, 우리는 외부의 소리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도사린 습관적인 기대를 만날 수도 있다.

열린 기념물의 날 50주년, 교회당 건립 50주년, 20년 전 세상을 떠난 ...
존 케이지 (John Milton Cage Jr., 1912년 9월 5일 ~ 1992년 8월 12일) 100주년 탄생일을 세 겹으로 축하하는 프랑크푸르트 바르트부르크 교회에서는 존 케이지 작품 제목의 숫자와 발상을 끌어들여 이색 자전거 대회를 연다. '4분 33초'와 '가능한 한 느리게'이다.

[4분 33초]

 

 


'4분 33초'는 세 악장으로 되어 있다. 1악장은 33초, 2악장은 2분40초, 3악장은 1분20초씩으로 되어 있다. 1952년 8월 29일 뉴욕 우드스탁에서 데이빗 투도르 첫공연을 했다. 'TACET'이라고 악상이 적혔다. "쉬잇!"하며 조용히 해 달라는 요청을 달고 있다. 첫공연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조용히 끝내 버릴 것을 몰랐던 것 같다.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시계 보고 다시 닫는 이 연주회의 실험성에 대해 지금은 그 내용이 많이 알려졌지만 모든 사람이 그 생각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실험같은 음악회를 두고 청중은 환호하기보다 비방을 했다. 하지만 '4분33초'는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4분33초 앉아 있거나 지휘자가 단원들 앞에서 4분33초를 서 있는 장면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4분33초는 긴장의 시간, 무음의 음악, 아니 소음의 음악이 흐르는 시간이다. 악기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하여 세상이 아주 조용한 것은 아니다. 쉼표가 연주되는 동안 그 공간을 채우는 소리는 숨소리, 기침소리,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존 케이지가 영감 받았다는 친구의 하얀 화폭에 그림이 없어도 조명과 빛의 상태에 따라 다른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처럼 청중들은 아무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긴장에 빠져들고 우리가 주류세계에 몰입하였을 때는 인지할 수 없지만 침묵하며 귀기울일 때에는 살아나오는, 주변으로 밀려난 소리를 비유한다.

음악과 만나는 자리에 긴장이 사라졌을 때 음악가는 음악의 미래를 염려했지만, 존 케이지는 음악이 아닌 것 같은 순간에서 비주류로 밀려한 호흡의 자리를 발견한 것이다. 음의 향연을 생략하고 청중을 숨죽여 기다리게 했다.

[느리게 느리게 가능한 한 느리게]

무음의 음악 혹은 쉼표의 음악을 통해 평소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돌아보게 하고 걱정되는 음악의 미래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존 케이지가 4분 33초를 쓴 때는 그의 나이 마흔이었는데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또 하나 별난 음악을 남긴다. 1985년에 '피아노 혹은 오르간'을 위한 ASLSP를 쓰고 2년 후 1987년에는 오르간 버전으로 '오르겐2/ ASLSP'를 썼다. 여기서 '2'라는 숫자는 영어로 '투'를 뜻하며 '둘'이란 뜻의 '투'와 '역시'란 뜻의 '투'라는 동음이의어 놀이를 한 것이다.

'가능한 한 느리게'는 A3 크기 넉 장 정도 분량이며 8부로 나뉜 이 곡을 8부를 모두 연주한 후 8부 중 한 부를 선택하여 한 부를 마지막에 반복하도록 되어 있다. 크리스토프 보서트와 한스 올라 에릭슨이 나움베르크 성 벤첼 슈타트티르헤 힐데브란트 오르겐에서 연주한 것이 음반으로 나와 있는데 71분 81초 걸리는 연주다. 8부를 연주한 후 5부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 연주가 가장 느리게 연주한 것은 아니다. 연주를 시작한 지 12년이 지났으나 아직 수백 년을 더 연주해야 하는 공연도 있다.

[이색 자전거 대회]

 

 

 



할버슈타트 부르카르디 교회 (Burchardikirche, Am Kloster 1, 38820 Halberstadt)에서는 2001년에 시작한 639년짜리 연주가 진행 중이다. 2000년을 기준으로 639년이라 함은 639년 전 14세기에 옥타브 당 열 두 음이 있는 피아노 건반식 오르간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르간 세대의 하나로서 할버슈타트에 입성한 것을 기념한다는 뜻으로 이 수가 선택되었다 한다. 한때 신음악이었을 오르간이 어느 새 오래된 악기가 되었지만 존 케이지의 '가능한 한 느리게 (Organ2/ASLAP)는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를 다시 한 줄기로 연결했다. 고도로 복잡한 수학적 음의 질서를 내던지고 원시와 현재를 슬쩍 건너뛰는 감수성이 여기서는 수백년이나 걸리는 느릿느릿함으로 재현된다.

별난 이 두 곡을 회상(오마쥬)하는 사업은 연주가 아니라 자전거 대회다. 교회악장 바우어만 씨에 따르면, 4.33 미터 자전거 루트를 가능한 한 느리게 완주하는 것이 핵심이다.

(대회 참가 신청은 9월 9일 당일 13시부터 할 수 있으며 14시부터 대회가 시작한다. 출발지점은 13시 45분에 지정된다. 더 자세한 것은 www.wartburggemeinde-frankfurt.de)

[50세 교회가 기념물 보호대상]


느리게 느리게 완주한 선수들에 대한 시상이 끝나면 교회당 안내가 4시 33분에 시작된다. 9월 초 독일 전역에 걸쳐 열리는 열린 기념물의 날(tag-des-offenen-denkmals.de) 행사로 보호대상 기념물을 공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교회는 수백 년 된 교회가 아니라 겨우 50년 된 교회다.

겨우 50년 된 교회가 기념물 보호대상인 것은 당시 전쟁 폐허가 곳곳에 남아 있는 프랑크푸르트에 일곱 채 교회당을 지은 설계사 베르터 노이만(Werner W. Neumann, 1916-2003) 덕분이다.

바르트부르크 교회당 건물을 소개하는 누리집에 따르면 노이만은 교회당을 설계하고 건축했을 뿐 아니라 도시 풍경을 바꿔 놓았다. 설계사의 손길은 전후 황폐한 마음에 젖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안겨다 주는 풍으로 교회를 설계하고 건축하였다.

두터운 벽과 바실리카 같은 큰 공간에 막힘없이 흐르는 빛과 큼직하고 안정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 공간을 믿음을 주고 안식처가 되는 느낌으로 지어내고, 거친 듯하면서 든든한 느낌을 주었다. 노이만은 본인이 직접 기독 신앙인일 뿐 아니라 '기독 미카엘 형제단' 회원으로 교회의 정신적 내용을 확장하고 강화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의 건축 또한 기술적인 차원을 넘어 그가 추구하는 종교 세계에 기여하였다.

바르트부르크 교회 건축은 1959년 성녀 엘리자베트의 기일 (1231. 11. 19)에 시작했다. 1962년 헌당할 때는 바르트부르크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르틴 루터의 기일(1546. 2. 18)에 맞추었다.

[저녁 공연은 존 케이지와 백남준]

교회 공개 안내를 하는 계기가 되는 열린 기념물의 날은 1991년부터 유럽연합위원회에서 정한 '유럽문화유산 기간' 행사이기도 하다. 매년 나라마다 행사일정은 조금씩 다르며 주제도 지역에 따라 각자 정한다.

행사가 있는 9월 9일이라면 더위도 한풀 꺾이고 시간은 추분을 향하는 시간. 프랑크푸르트 바르트부르크 교회 저녁 음악회 '소리-공간 교회(Klang-Raum Kirche)'가 시작하는 19시에는 으스름이 깃들어 낮게 내려온 색유리창의 원색이 화안하게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연주회 제목은 '소리-공간-교회'.

독일 전역에 알려진 중견배우이자 피아니스트인 니콜라 그륀델이 존 케이지의 '네 개의 벽'(Four Walls)를, 교회악장 클라우스 바우어만이 백남준의 '원'(One for Violin Solo)을 연주한다.

 

풍경 31호 (2012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