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

베르디의 마음

이탈리아 통일을 지향한 시대정신

2013년은 이탈리아 애국자 가곡왕 베르디 탄생 2백 주년





200년 전. 이탈리아 북구 에밀리나 로마냐 지역에 자리한 부세티. 이 중에서도 레 론콜레 (Le Roncole)라는 작은 마을에서 주셉페 베르디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음식점을 하는 보통사람이었다. 

오늘날은 부세토에 당시 교회에서 오르겐을 연주하던 소년 주세페의 생가와 박물관과 동상이 서 있다. 세계로 퍼져나간 베르디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들리는 이 기념장소는 이탈리아를 사랑한 음악가에게 이탈리아가 예우를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레 론콜레에 있는 베를린 생가는 푸치니 생가와 더불어 유럽 문화유산에 올라 있다. 




통일 이탈리아를 꿈꾸던 시대


쥬세페 베르디(1813-1901)가 산 시대에 이탈리아는 전쟁과 외세에서 벗어나 려는 노력하는 시대정신이 불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러한 시대정신이 절박했다는 뜻도 된다. 베르디가 태어날 무렵 베르디의 고향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프랑스군 점령지에서 태어난 쥬페세 베르디의 출생신고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올라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나폴레옹을 몰아낸 유럽 여러 나라들이 비엔나에 모여 유럽의 질서를 재편성할 때 유럽의  여러 나라의 권력은 이탈리아국경을 나폴레옹 점령 이전처럼 되돌려 놓으려 했다. 즉 나폴레옹 점령 이전 여러 개 왕국과 귀족들의 나라로 돌려놓겠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1814년에 이탈리아 혁명을 위해 조직된 카르보나리 당은  이탈리아의 왕정을 마감하고 공화국을 세우자는 혁명기운을 조성하고 있던 터였다. 만해 한용운의 시에도 인용되는 이탈리아의 영웅 마치니는 “아드리아해에서 로마”까지 걸친 하나의 이탈리아를 꿈꾸었다. 

이러한 이탈리아인의 꿈과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왕국의 세력을 지원하고 프랑스는 로마의 교황청을 지원하였고 이탈리아 통일을 꿈꾸는 영웅들이 명멸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공화국은 아니더라도 하나의 통일왕국이 생겨났다. 1861년에 사르디니아 왕국의 왕인 비토리아 엠마뉴엘레가 왕이 되어 베니스와 로마를 제외한 통일왕국을 이루고 1876년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의 와중에서 프로이센과 협력하여 베니스를 챙기면서 통합이 진전되었다. 

교황청이 자리한 로마를 이탈리아 수도로 만들기 위해 가리발디(1807-1882)는 1867년 로마로 진군했다. 비록 당시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가리발디의 애국 행동은 이탈리아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히브리 포로들의 그리움과 희망


역동기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베르디에게 자유와 해방에 대한 꿈을 심어 주었고 베르디의 음악재능은 이탈리아가 당대에 품고 있던 꿈과 희망을 이루는 과정에서 쓰여졌다. 

어릴 때 부세토의 후원자가 있어 음악을 공부하고 오르겐 연주자로 활동하고 계속 음악을 하였지만, 아직 음악으로 대성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이 설흔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받아든 대본이 그의 열정을 불붙였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예수살렘 2차 공략시기 즉 구약성서 다니엘서의 배경이 된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었다. 

느부갓네살 왕을 뜻하는 <나부코>가 제목이 된 이 오페라는 1842년 3월 9일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당시 오스트리아의 간섭에서 자신들의 땅이 해방되길 바란 이탈리아 사람들은 <나부코> 속에 나오는 히브리인들의 갈망을 자신의 일처럼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 훗날 통일이탈리아의 군주로 비토리아 임마누엘레를 추대하려던 이들은 베르디(Verdi)에서 '이탈리아왕 비토레 엠마무엘르'(Vittore Emanuele Re d’Italia)의 약어를 뜻하며 소리쳤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당국 또한, <나부코>에 담긴 메시지를 알았기에 베르디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북아메리카 백인들의 <독립전쟁>과 프랑스의 <시민혁명> 이후 자유를 갈망하는 분위기가 늘어나면서 군주들을 잔뜩 신경 쓰던 터, 베르디의 <나부코>는 히브리 백성들의 사정을 소재로 하였으나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자유롭고 싶은 이탈리인들의 염원과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프라데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와 노역을 하는 히브리인들이 두고온 고향 빼앗긴 땅을 그리며 해방을 기원하며 부르는 합창곡 “히브리 노예들의 노래”(혹은 포로들의 합창 Gefangenenchor)는 널리 알려진 노래이다.


“가극왕” 베르디


<나부코>로 성공을 거둔 베르디는 그 후 빅토르 위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리골레토>, 러시아 정부의 위촉작품 <운명의 힘>, 이집트 정부의 위촉작품 <아이다> 등을 써 지난 150여 년 유럽의 오페라 공연장에서 지속적인 갈채를 받아온 작곡가로 손꼽힌다. 

베르디를 두고 “가극왕” 이라 한다.   김재형 테너(Alfred Kim)에 따르면, 베르디가 당대 최고의 가극왕으로 군림하며 개성이 강하면서도 가장 민족주의적인 오페라를 썼다. 초기에는 벨리니와 도니체티 같은 선배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아름다운 선율 위주의 곡을 썼으나 중기에 들어서는 당시 19세기 유럽을 휩쓴 격랑의 시대를 반영하듯 낭만주의 문예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극과 음악이 함께할 수 있고 관현악법이 이를 뒷받침할수 있게” 작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