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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12월 28일, 동백림 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 고 강혜순 여사 장례

12월 28일 프랑크푸르트 근교 호이젠슈탐 시립공원묘지. 독일 전역에서 모인 동포들이 고 강혜순 여사를 떠나보내는 예식을 올렸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불렀던 노래, 윤극영의 <반달>이 울려퍼졌다. 손녀가 가야금을 뜯고 참석자들을 노래를 함께 불렀다. 상주는 다름슈타트 음악 아카데미 정일련 선생이다. 어머님이 애창하시던 노래라 했다.

 

<반달>을 좋아했다는 고 강혜순 여사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소녀시절을 보내고 한국 전쟁 의 어려운 시기를 지난 후 장학생으로 독일에 온 약혼자 정규명 선생을 따라 1962년에 독일로 왔다. 1967년에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세 살 아들과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한민족유럽연대 최영숙 의장은 조사에서, 세 살 때 기억으로 인해 유, 소년 시절 아들은 검정 정장을 한 남자를 두려워하곤 한다고 고인이 말한 것을 회상하였다. 당시 독일 정부의 석방 노력으로 다시 독일로 돌아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에 당시 독일의 민주화 인사들과 남편 고 정규명 박사와 함께 동참하였다.

 

장례식은 상주가 고인의 삶과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상주 표현에 따르면 "열렬한 애국자"였던 부친은 분단상황을 몸으로 거부하고, 혈육을 만나러 북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학자는 간첩으로 몰렸고, 유망한 물리학자 정규명 박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독일에 살게 되면서 민주화 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두부 공장을 운영하였다. 노년에 부친은 젊은 날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였으며 그 삶을 늘 함께해 온 모친은 15년간 아버지의 병수발을 드시면서 늘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였다고 회상한다.


상주의 친우이자 상주가 출강하는 다름슈타트 음악원의 학장은 음악원 차원에서의 조의를 표하는 한편, 상주의 친구로서 애도를 표했다. 학장은 12월 28일 전후하여 고인은 언제나 상주 되는 정일련 선생과 친구에게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었는데, 올해는 그런 모임을 갖지 못하고 이렇게 참석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장이 기억하는 친구의 어머니는 강인한 여성이었으며 간결한 표현을 사용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섬세하게 들으면 인자함이 묻어나는 그런 분이었다고 하였다. 


최영숙 한민족유럽연대 의장은 고인이 암 진단을 받고 마지막 7개월 동안 베를린에 머물던 시절 함께 호숫가를 산책하던 기억을 되살리며 11월에 한국 갈 때 고인이 좋아하던 명란젓을 사 오기로 하면서 다녀올 때까지 살아계실 것을 약속하였으나 그 사이에 돌아가신 것을 안타까워 했다. 


강인하고 인자한 여성 고 강혜순 여사는 그렇게 많은 추억을 지상에 남겨 두고 홀연히 그의 소풍을 마무리하였다. 

 

고 강혜순 여사는 193442일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으며 별세한 날은 20161118일이다.  


고 정규명 박사의 비석에는 "조국은 하나다 /  조국은 하나다 / 정규명 / 물리학 박사 / Dr. Phil. nat. / Kyun Myung / Chung" 이라 쓰여 있고 그 아래 생몰연대가 적혀 있다. 이 묘지에 고 강혜순 여사가 합장된다. 


이로써 박정희 독재로 인해 고난을 받고 이역만리에서 고국의 민주와 통일을 열망하던 민주 통일 인사 또 한 분이 떠나갔다. 




사진: 윤운섭




조사


먼저 고개를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오늘 겨울날씨보다 더 시리고 아픈 마음으로 고 강혜순 여사님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님을 잃은 우리는 너무 슬프고 춥습니다.


고 강혜순 여사님을 처음으로 뵌 것은 67년 4월, 세월이 흘러도 앞서가신 정규명박사님과 여사님의 인자하신 첫 모습은 아직도 눈앞에 선합니다. 


그렇게 순수하신 분들이 군사독재자가 조작한 동백림 사건 때 북에 있는 가족의 행방을 찾았다는 이유로 납치되어, 어린 일연이와 함께 가혹한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당시 얼마나 혹독한 고초를 당했기에 어린 일연이가 유소년이 되어서도 검은 옷의 정장한 남자만 보면 무서워한다며 고인은 슬퍼했습니다.


이런 모든 역경을 겪으시면서도 박사학위에 여념이 없는 남편에다 늦게 두신 호련이까지, 모두를 보살피신 고인께서는 참으로 대단하셨습니다.


민건에서부터 한민련, 민협 그리고 범민련에 이르는 사회활동으로 분주하셨던 남편 정규명박사님 뒤에서 그 많은 손님들의 뒷바라지로 힘든 날들을 보내시면서도 언제나 남북통일을 위한 일념으로 기꺼이 견뎌 내셨습니다.


조직의 재정을 돕기 위해 시작한 두부공장을 운영하면서 고인께서는 집안일은 물론 공장일과 육아로 하루도 쉬실 날이 없으셨습니다.


훗날 병고로 시달리시는 고 정규명 박사님을 10여 년 간호하면서도 의연히 가정을 꾸리며 두 아드님을 훌륭하게 키우셨습니다. 부군이 먼저 가시니 그리워하며 매일 묘소를 찾아 위로하셨습니다. 운명하시기 직전에도 찾아오셔 애틋한 손길로 묘비를 쓰다듬었습니다.


고인은 한민족유럽연대 자문위원으로 단합대회 및 오월 민중제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하셔 우리 모두에게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크고 작은 많은 추억들을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금년 4월 갑작스럽게 찾아온 중병에도 불구하고 그 의연함과 웃음을 결코 잃지 않으시고 병고와 맞서 싸우시다 11월 28일 끝내 우리를 떠나셨습니다. 아픔이 너무 큽니다.


그래도 우리는 슬픔을 멈추고 그토록 사랑하신 부군 곁으로 가시는 강혜순 여사님을 고이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여사님!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부군 옆에서 편안히 쉬십시요.


우리는 여사님을 길이 기억하며 님의 뜻을 받들어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혼신을 다하겠습니다.


2016년 12월 28일 한민족유럽연대 자문위원 이종현 드림




작별인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 강혜순어머님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 나셔서 소녀시절을 보내고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민족상잔 6.25를 겪어야 했습니다. 물리학 장학생으로 독일에 온 약혼자 정규명 선생님을 따라 1962년에 독일에 오셔서 결혼하고 64년 첫 아들 일련씨를 나으셨습니다.


큰아들이 3살때 동백림 사건에 연유되어 옥살이를 하셨습니다. 남산 안기부 취조실에 한께 지내던 아들은 어머님이 서대문 구치소로 옮길 때 양복 입은 안기부 요원이 친척집에 대려다 주어 후에 오랫동안 양복 입은 남자만 보면 무서워 해서 가슴이 많이 아프셨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독일 정부의 개입으로 독일에 돌아오셔서는 본격적으로 민주인사들과 함께 민주화,통일 운동을 하시던 남편 고 정규명박사님 곁에서 강어머님은 열심히 내조하면서 박사님이 하신 모든 운동에 동참하셨습니다. 후에 고 정규명 박사님이 병환으로 오래 고생하셨을 때 10년간 간호하시면서 와중에도 늘 행사에 함께 참가하시고 그 많은 방문객들을 접대하셨습니다.


항상 한반도의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셨지요. 어머님 들으셨지요 지금 한국에는 주권회복을 위해 거대한 촛불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폐한 박근혜 대통령과 잔당들을 탄핵하고자 이 추운 겨울에 8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습니다 . 박근혜는 유럽의 민주인사들과 어머님을 간첩이라는 누명을 씨워 한국으로 납치해 간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 아닙니까. 


애지중지하던 두 아드님과, 며느님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거라던 5명의 손녀손자들, 그리고 항상 마음에 두고 사셨던 동지들, 그들을 거론하실 때는 얼굴에 함박 웃음이 가득했지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어떻게 떠나셨나요.


저에게는 베를린에서 마지막 7개월 동안 어머님을 가까이 모실 수가 있어 크나큰 행운이었고 영광이었습니다. 항암치료를 하면서도 걷는 것을 좋아하셔서 베를린과 포츠담의 많은 공원과 호수가의 산책길에서는 처녀 시절의 얘기들을 조근조근 들려주셨지요.


한국 가서 좋아하시는 명란 젓갈 쪼금만 사오라고, 제가 돌아올 때까지 꼭 살아 계신다고 약속하시고선 무엇이 그리도 급해서 황망하게 서둘러 가셨나요.


마지막 기간 베를린에 계실때 법륜스님의 법문이 참 좋다고 듣고 나면 마음이 많이 안정 된다고 즐겨 찾으시던 정토 법당, 그 힘든 와중에도 법우들을 먹인다고 정성스럽게 싸오시던 공양반찬들... 그렇게 많은 헌신으로 쌓은 공덕들 극락왕생하셔서 회향 받으시옵소서.


어머님 ,강 어머님, 정규명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사모님 소리가 싫다며 어머니라 불러 달라시던 어머님,저희들은 이제 작별인사를 드리고자합니다.


어머님은 저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모든 시름 놓으시고 평안하게 가시옵소서.


2016.12. 28 최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