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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1)

2015년 난징 리지상에 세운 '위안부' 박물관. 박영심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이 곳을 찾아 자신이 갇혀 있는 '위안소'라고 증언하셨다 한다. 과거 '위안소'를 활용한 이 박물관에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유품과 할머니들의 증언 기록과 그 외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다. 중국에서는 '위안부' 피해자가 40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진: 김현정

모든 오해는 내가 아는 것과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이 같다고 시작하는 데서 출발한다. 다름을 굳이 찾아서가 아니라 다를 수 있다는 전제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착각한다. 같은 생각을 하면 좋다. 또 그렇게 하여야 무슨 일을 이루어낼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다르다는 것은 현실이다. 현실에서 출발하자.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1) 피해자 수


1998년 유엔 인권위 특별보고담당관 게이 맥더걸 변호사는 20만여 명 소녀와 여성들이 강간 센터에서 수난을 당한 사실을 유엔인권위에 보고한다. 우리들이 그동안 이십만이라는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진 숫자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20만은 40만이 되기도 한다. 이미 게이 맥더걸기 20만이란 숫자를 얘기할 무렵 중국 상하이 사범대 추스량 교수는 41만명설을 내놓았지만 아무도 제대로 관심갖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난징 리지샹에 '위안부' 박물관이 서면서 다시 추스량 교수의 발언에 한국언론이 귀를 열기 시작했다. 추스량 교수에 따르면, 중국인 피해자만 하여도 20만 명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40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중 대부분인 한국인과 중국인이라는 이야기이다. 

(2) 강간소

그곳은 '위안소'라 하지만 사실은 강간소(rape center)였다. 불편해도 그 단어가 가리키는 곳의 본질에 어울리는 단어선택이 필요한 곳으로 보인다. 실지로 '위안소'란 단어 또한 모든 강간소를 가리키는 표현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사들은 새로운 도시를 점령하면 첫 일로 바라크를 지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의 공공건물이나 개인주택을 사용해서 '위안소'로 사용했다. 물론, 군인 전용이었다. 

(3) 국가의 책임 여부

일본이 퇴각하면서 많은 서류를 없앴다고 하지만 증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세울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얘기가 일본이 증거가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증거는 많다. 우선 일본 정부 문서를 만나면서 요시미 요시야키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몰입하였으며 또 그 사이 수만은 당사자들의 증언이 있다.  당사자라면 '위안부' 피해자 뿐 아니라 양심의 발로로 과거를 증언하는 전속과 군인들이다. 또 연합군이 주둔한 지역에서는 연합군이 전후 손에 넣은 증언과 자료들이 있다. 그 결과 오늘날은 '위안부' 모집과 동원에 군만이 관여한 것이 아니라 일본 내무성 즉 일본 정부가 해외의 군부로부터 비밀 문서를 받으며 '위안부' 이송을 맡은 민간 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으마 또 식민지 총독부가 소녀와 여성들을 오가게 하는 과정에서 모두 하나같이 결탁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자료들이 충분하다. 일본 국가가 이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할머니들에게 와서 큰절하고 사죄하여야 할 일이란 점에서는 별 일 없다. 

(4) 22개 지역에 촘촘히 흩어진 '위안소'

놀라운 것은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관심을 갖는 한국인들 중 적잖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를 한국만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위안소' 즉 rape center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곳곳에 있었다. 군대가 가는 곳에는 '위안소'가 있었다. 그곳에 갇히는 소녀와 여성들은 한국과 중국과 타이완에서 군인들이 움직일 때 함께 끌려갔다. 그리고 필리핀 같은 현지에서는 강간과 폭력을 통해 '위안소' 수요가 채워지기도 했다. 

 

일본 여성도 '위안부'로 갔다. 강점기 하여 조선 여성들은 취직사기나 납치로 끌려갔다. 필리핀에서는 여성들이 무차별 살해, 강간, 연행을 당했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명명하는 이름 일본군 '위안부'는 서로 다른 삶의 전제를 안고 있었다 .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루에도 여러번 죽음을 생각해야 하더 지옥같은 삶이었다. 

 

이에 대해 가장 최초로 증언한 사람은 일본인 '위안부' 시로타 스스코로서 그녀는 자신은 장교를 상대로 하였지만 하루에도 여러번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사병을 상대로 하는 한국인 동료들은 오죽하였겠느냐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극한 상황에 처해서 학대받고 죽어간 조선 '위안부'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뜻에서 그는 '가나타 부인의 마을'에 기림비를 세웠다. 

 

촘촘히 들어선 그 '위안소'는 일본 정부와 군이 함께 조직적으로 관리한 것이었다. 민간업자는 하층 심부름꾼일 뿐이었다.

 

<조명되지 못한 필리핀 '위안부'> 2006. 6. 25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7&aid=0000001667

 

조명되지 못한 필리핀 ‘위안부’문제

<일다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현재 담론의 지형을 살펴보고 운동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기획을 연재한다. 그 출발로 우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국 ...

news.naver.com

<위안소와 위안부의 수> 

http://www.awf.or.jp/k1/facts-07.html

 

위안소와 위안부의 수

위안소는 아시아 전역에 퍼졌습니다. 1942년(쇼와 17년)9월 3일 육군성 은상과장의 보고에서는 "장교 이하의 위안시설을 다음과 같이 만든다. 북지(北支) 100개, 중지 (中支)140, 남지(南支) 40, 남방(南方)100, 남해(南海)10, 가라후토(樺太) 10, 계 400개소"로 나옵니다. 기금의 자료위원회의 보고서에 게재된 논문은 정부자료에 근거하여 중국의 양쯔강(楊子江) 변에 있던 위안소에 대해서 상하이(上海) 24, 항조우(杭州) 4, 쩐지앙

www.awf.or.jp

*** 50억 내라 하던 것을 박정희가 3억으로 해결하였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쨌든 이 숫자는 맞는 숫자이다. 그런데 왜 세이주로의 발언만 근거 없다고 하는 것인가. 1965년 11월 20일에 정치인 아라후네 세이주로 씨의 발언 중 오로지 조선인 '위안부' 숫자만 가짜라고 주장하면서 20만 명 설을 근거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1965 회담에서 한일간에 '위안부'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박정희도 몰랐고 세이주로도 '위안부'에 대해서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은 당시 신문을 통해 증명된다. 단지 협상 내용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당시 한국은 한일협상 반대의 물결이 거셌다는 것도 염두에 둘 일이다. 

<난징 리지상의 '위안부' 박물관>

http://german.xinhuanet.com/2015-12/02/c_134875117_5.htm

 

Gedenkstätte für "Trostfrauen" in Nanjing eröffnet - Xinhua | german.xinhuanet.com

 

german.xinhua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