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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공연과 청중: 오틸리엔 수도원에 울려퍼진 국악

음악은 어떤 예술보다도 시간의 예술이다.

6월 24일과 25일 이틀동안 뮌헨 남쪽에 자리한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열린 코리아페스티벌 기간 중 이틀동안 매일 15시에 수도원 본당(Abteikirche)에서 열린 한국음악 공연은 특별한 시간여행이었다. 무형문화재 30호 ‘가곡’ 예능보유자이자 가곡전수관 대표인 조순자 명인과 국악연주단 <정음>의 공연은 성당을 가득 채운 청중들을 천년의 시간으로 안내했다.

24일 17시에 수도원 피정의 집 앞 야외무대에서는 박현숙 교수(서원대)의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 이미륵 기념사업회 박균 회장의 <승무>, 서울 노원구 구립무용단의 <화전무>, <사랑의 춤>가 공연되었다. 


수도원 본당의 가곡






북두칠성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분께

민망한 발괄 소지 한 장 아뢰나이다

그리든 님을 만나 정엣 말삼 채 못하여 날이 쉬 새니 글로 민망

밤중만

삼태성 차사 놓아 샛별 없이 하소서

(가곡 계면조 농 <북두>에서)


중세식 그레고리오 성가와 시편이 울려퍼지는 가톨릭 성당 정면 제단 있는 곳이 국악무대로 변신했다. 국악연주단 <정음>에서 가곡 우조 이상대엽 <버들은>, 가곡 계면조 이삭대엽 <언약이>, 가곡 계면조 평통 <북두>, 가곡 반우반계 편락 <나무도>, 가곡 계면조 대받침 <태평가>, 생황 단소 양금 병주 <수룡음>, 거문고 대금 병주 <하현해탄>, 피리독주 <상령산 풀이>를 연주하였다.  바흐의 평균률에 바탕한 화성학이 아니라 단선률로 이뤄지는 음들이 말 그대로 서로 섬세하게 조화를 이루는 이 세계에서는 서정과 서사와 극의 경계 또한 없다. 


조순자 명인은‘가곡’이라면 ‘그리운 금강산’이나 ‘가고파’를 생각한다고 하나방송과 인터뷰하면서 말했다. 사실 그렇다. 그런데 ‘가곡’은 중요무형문화재 30호이며 2010년에는 그 역사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음악이라 한다. 해외문화홍보원(www.kocis.go.kr)에 따르면, 가곡의 뿌리는 고려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사국 시대 영향을 받아 형성된 고려 시대 향악곡이 조선전기에 만대엽으로 발전하고 만대엽은 빠르기에 따라 중대엽과 삭대엽으로 발전하였으며 조선 후기인 17세기부터 삭대엽이 계속 발전하여 오늘날 가곡의 뼈대가 형성되었다 한다. 


경남 마산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있는 가곡 전수관은 국립국악원의 경남분원이란 별칭까지 들었다. 조순자 명인은 경남 하나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가곡의 전승을 위해 다양한 계층, 다양한 학력의 사람들과 폭넓게 인터뷰하면서 가곡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든 이화세계의 철학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국악연주단 <정음>의 오틸리엔 공연은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과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해외진출사업에 공모하여 항공료를 지원받았으며 연주단은 국악의 해외보급 차원에서 노개런티 공연을 하였다. 


승무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승무>는 일반적으로 직접 보기보다 조지훈의 시를 통해 먼저 접하는 작품이다. 24일 늦은 오후 아직 작열하는 태양 열기가 남은 수도원 야외 무대에서 박균 회장이 <승무>를 추었다. 


승무의 기원으로는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유혹하기 위해 추었다는 황진이 유래설, 육관대사가 선녀를 만나 미혹되었다가 번민하다가 불교의 도를 깨달으며 해탈하는 이야기를 담았다는 구운몽 인용설, 파계하여 환속하였다가 번민한다는 파계승 번뇌 표현설 등 다양하다. 춤사위는 불교제례에서 쓰이는 춤을 반영하였지만 실제 불교제례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민속춤의 정수가 되었다 한다. 


가야금 산조


가야금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야 가실왕 때 우륵이 만든 악기로서 천5백 년 된 악기이며, 한교경의  <가야금의 발생 연대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그 유래가 3세기나 기원전 1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오래된 악기이다. <가야금 산조>라는 가야금 독주곡에 대해 박현숙 교수는 처음에는 아주 느린 장단에서 시작하여 갈수록 빠른 장단으로 변화해 가는 곡이라고 설명한다. 근원은 무속에 두고 있으나 독자적인 음악 장르로 발전하였으며 여러 유파가 있다. 박현숙 교수는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를 연주했다. “아기자기한 오른손 연주법”과 왼손으로 현을 흔들어 떠는 연주법인 ‘농현’이 조화하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국립국악원 홈페이지에 따르면, 박 교수는 가야금산조의 기틀을 마련한 김창조의 손녀인 고(故) 김죽파(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 명인의 제자이다. 1974년 서울대 음대 3학년 시절부터 김죽파 명인이 타계한 1989년까지 15년간 김죽파 명인을 직접 사사하였다. 


공연 전날 야외 무대에서 리허설을 하던 박 교수는 가야금 소리를 신기해 하는 수도원 여성 방문객에게 왼손의 농현을 시범으로 보여 주었다. 가까이서 듣는 농현은 마음의 현을 흔들어 놓는다. 


50년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박 교수의 손 끝에는 굳은 살이 상처처럼 훈장처럼 박혀 있다. 


낯선 것에 대한 예의


공연 자체도 아름답지만 공연의 맛은 그 청중을 통해 완성되기도 한다. 


성당에서 <정음>의 공연을 듣고 나오는 길에 만난 독일인 라이너 간스 씨는 선장으로 배를 타며 여러 나라에 다니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한 경험이 있다. 중국 음악은 많이 들었으나 한국 음악은 처음이라 하면서 한국 음악이 중국 오페라와 비교하여 한국 정악은 훨씬 더 부드러운 선율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낯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낯선 것은 맞지만, 다른 나라 음악을 듣는 것은 그에게는 “영혼의 여행”과 같다는 것이다. 


한편, 작년에 일본을 방문하였다가 한국까지 들렀던 독일인 아이티 전문가 B 씨는 일본 음악과 비교에 비해 한국 음악이 부드럽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을 여러 번 다녀온 베른하르트 씨는 웃는다. 


“여민락을 몰라서 그래요. 여민락 한번 들어보세요. Schrill해요.”


한국인들은 ‘우수성’을 말하기 좋아한다. 아직 만나지도 않고 함께 살아보지도 않은 청중들이 한국 것을 최고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계 속의 현지인 청중들은 그러한 비교급에 관심 없다. 한국 정악 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신문 귀퉁이 일정란에서 보고 함께 찾아온 가이스 씨는 ‘우수성’의 비교에는 관심 없는 것이다. 낯선 것을 주의력 있게 경청할 뿐이다. 


서울에서는 지역 신문에 몇 줄 난 공연 안내를 보고 한나절 시간을 내어서 공연을 보러갈 수 있는 여유가 되는 노부부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문화향유하는 방식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사회의 안정도에 달려 있는지라, 물론, 망연할 뿐이다. 


행사의 그릇


맛있는 음식도 어울리는 그릇에 담아야 그 가치가 온전하게 드러난다. 독일에서 듣기 귀한 국악공연은 진행과정에서 몇 가지 아쉬움을 남겼다. 


첫째, 야외공연에 진행자와 통역자가 준비되지 않아 공연자들이 진행자와 통역자를 급조해야 한 사실은 초청된 예술인들에게 결례가 되었다. 세계화된 시대에 해외공연도 많이 다니고 한국사회가 화려해진만큼, 또한 재독동포사회의 현지 적응력이 높아진만큼 전문 예술인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좋을 듯하다. 


둘째, 행사를 치루는데 재정이 모자라면 국내 예술인을 보수 없이 초빙하기보다 재독동포사회에도 존재하는 유능한 전문 국악인들에게 무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마지막으로, 전문 예술인들이 공연하는 가설무대에 운동회 만국기처럼 한독 양국 국기가 색색으로 달린 것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누가 이 양국기 설치에 책임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라사랑은 체육대회 가설무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국기 남발은 나라 격을 더 올려주는 것도 아니고 공연자의 예술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총체적 싸구려 디스플레이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6월 재독동포사회, 여기저기서 국악공연 소식이 들렸다. 26일 베를린에 한국문화원에서 국악 공연이 열리고 그 외 중부와 남부 도시에서도 국악 공연이 열렸다 한다. 국악을 세계에 알리려는 좋은 뜻 못지 않게 행사 집행도 좀더 미학적인 관점에서 완성되면 더욱 아름다운 체험이 될 것이라 싶다. 


* 이 기사는 독일에서 발간하는 한글문화신문 <풍경> 77호에 실렸습니다.  

77-5.pdf



[info] 가곡전수관 블로그: http://gagok.tistory.com/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