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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평화란 무엇인가

평화란 무엇인가


수원시민들이 선물한 평화의 소녀상, 비젠트에 건립



풍경




2016년 9월, 수원시와 수원시 자매도시인 프라이부르크 간 프로젝트로 추진되던 프라이부르크 소녀상 건립 계획이 무산되었다. 일본의 방해가 있으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일본의 꼼꼼한 방해로 인해 부담이 커진 잘로몬 프라이부르크 시장이 수원 측에 건립 계획 취소를 통보해 왔기 때문이다. 수원의 활동가들에게는 그간 준비해 온 일들이 물거품이 되는 듯한 허탈한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반 년 후 2017년 3월 8일에 독일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되었다. 독일의 활동가들은 그렇게 무산된 소녀상 건립 사안이 실패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는 의지로 “독일평화의소녀상 독일건립추진위원회”(이하 독일 건추위)를 구성하였으며 10월 5일에 독일을 방문한 “독일평화의소녀상 수원추진위원회”(이하 수원 건추위)와 협약식을 가졌다.

 

프라이부르크 프로젝트 추진이 무산된 2016년 9월 20일 경부터 1주일간 인터넷 시대에 어울리게 상황 소개를 포함하여 온라인상으로 취지문을 발송되었다. 이 취지에 동조하는 이십여 명의 동포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면서 1차 독일건추위가 구성되었다. 이를 근거로 하여 10월 첫 주에 수원 건추위가 독일을 방문하여 독일 건추위와 협약식을 하였다. 수원 건추위 독일 방문 당시 마침 재독 한인교회 협의회 총회가 있어 소녀상 건립 사업이 협의회 회원 교회에 효율적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건립식


109회 세계 여성의 날, 레겐스부르크 인근 비젠트 시에 자리한 네팔 히말라야 파비용 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이 섰다. 1941년 일본군에게 끌려가 따가운 역사를 살아온 90세 안점순 여사를 비롯하여 43명의 수원 시민들과 독일 현지의 동포들과 몇몇 독일인을 포함하여 모두 120여 명이 참석한 이 제막식은 공원이 정식으로 개원하는 5월 1일에 정식으로 성대한 제막식을 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제막식이라 이름하지 않고 봄맞이(?)라 이름하였다. 


미술사학자 마르틴 슈미트 박사는 독일에서 6개월 만에 조각상을 세우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물론 그 6개월간 기적도 여러 번 있었고 일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설정한 무모한 목적에 힘들어 하기도 하였다. 


아직 오지 않은 봄


네팔 히말라야 공원에도 3월 그 날보다는 좀 더 따뜻한 날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조각으로서의 평화의 소녀상에게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일본 공관측이 2015년 12월 28일의 합의를 빙자하여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청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 공관측에서 네팔 히말라야 공원 이사장에게 전화를 하여 건립하는 데 든 비용을 지불할 터이니 소녀상을 철거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만도 아니다. 헤리베르트 비르트 공원 이사장의 전자메일함에는 정체불명의 메일들이 쌓였다.


일본의 방해야 어차피 예상한 것이지만,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것은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기뻐하는 사람들 사이에 아직 준비되지 않은 마음이다. 그 마음이란 평화의 소녀상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에 대한 공동의 상식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조각으로서의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한다는 것과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아직 충분히 공감되지 않았으며 아직도 공론화 과정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건립된 것이니 평화의 소녀상이 그 자리에 그냥 조용히 평화롭게 서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을 한다. 최선이 무엇인가? 일본의 방해에 대해 어떠한 논쟁도 하지 말고 침묵하는 것인가?


사회조각으로서의 소녀상은 건립 그 자체가 사회적인 행위이며 그 조각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논의 그 자체가 조각의 영향력의 일부이다. 따라서 조각상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논의는 진리탐구와 정의로운 역사의식의 확장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쓰인다. 그렇지 않다면 평화의 소녀상이 목가적인 초원에서 와선을 하며 따뜻하게 미소 짓는 불상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평화의 소녀상은 그 자체로 평화가 아니다. 평화의 소녀상은 정의로운 해결에 이르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와 피해자에 대한 기억을 자극하는 조각인 동시에 그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염원을 공유하는 살아 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물리적인 완성은 작가가 하는 것이지만 그 작품의 사회적 완성은 수용자와 그 작품을 만나는 사회 구성원들이 해 나가는 것이다. 


“안점순 할머니와 함께하는 봄나들”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평화란 무엇인가


평화는 완결된 부처의 미소에 현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일 뿐이다.  과거의 희생자를 기억하지 않고서는 평등한 인간 세상을 불러올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그 평화의 길로 가는 과정이며 평화의 조각상을 건립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 평화의 길에 작은 발자국 하나 보탠다는 뜻이다. 


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한 이는 김서경  김운성 부부작가이지만 그 소녀상의 사회적 의미는 소녀 옆 빈 자리에 대한 책임의식이 확대되어 가면서 완결되어 간다. 그 완결화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 욕망의 가장 추악한 형태인 전쟁의 과거 현재 미래와 고통 받는 나와 당신을 만난다. 그러하기에 평화는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쟁취해 나가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독자들은 평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2017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