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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당신의 초상화가 당신 대신 늙어 줄 수 있다면?

 당신의 초상화가 당신 대신 늙어 줄 수 있다면?

인간의 미혹과 세상의 이치에 관한 이야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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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concorde home

아름답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따로 노는 것일까? 이런저런 논란이 있지만 바로 이 연관관계에 관한 질문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떨쳐버릴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아름다움에 관한 이론가 뿐 아니라 작품을 직접 만드는 이들이 이 문제로 고민했다. 그 고민은 영혼을 판다는 것이라든가 악마와의 계약 같은 무시무시한 모티브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론 개인의 문제를 많이 연구해 온 서양 문화 이야기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도 핵심 소재인데 오스카 와일드 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 이야기는 종국에 가서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심과 세상의 이치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문학작품도 결국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치의 문제를 벗어날 수 없는가 보다.


1. 자기 도취와 영혼의 문제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박사가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하면서 "시간아 멈추어라" 할 정도로 뿅 가는 찰나영혼을 넘기기악마와 계약했다. 하지만 이 위험한 놀이는 결국 피스토펠레스가 계약에 따라 박사의 영혼을 가져 가려고 하는 순간 천사들이 방해해 버려 실패했다. “악마가 사기 당했다”고 하며 메피스토펠레스가 툴툴거렸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세기, 정서적 난리법석을 떨던 그 세기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악마랑 맺는 계약을 좀더 처절하게 그렸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한 도리언 그레이는 청춘의 매력과 마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초상화가 그 대신에 늙어 주면 좋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영화로서의 미덕을 보여 준다.

언어적으로 치명적인 선언이 있기 전, 아직 천진난만하고 아름다운 도리언 그레이에게 바로 그 유혹에 빠질 요인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영상으로 투사한다. 19세기말 메트로폴 런던에 도착한 순진한 청년 도리언 그레이가 거울 앞에 서서 국화꽃을 자신에게 달아 보는 장면이라든가 실물보다 더 아름다운 초상화 앞에서 도도한 모습으로 서 있는 도리언 그레이. 영상 언어는 이처럼 짧은 순간에 본질을 암시하기도 한다.


2.
순간의 선택

사실 도리언 그레이가 영혼을 파는 것은 거대한 맹세의 언어라기보다는 순간순간 선택의 순간을 통해 진행된다. 도리언의 영혼 팔기는 소비주의와 자유 지상주의 사회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듯, 유혹의 물결에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그때그때의 선택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은 괴테의 파우스트와 달리 나중에 계약을 무시하고 악마에게 사기쳐 버릴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 미혹과 허영과 불행의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는 악마를 속일 필요없이 그때그때 장부를 정리해 갔다. 악행이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신음까지 해 가며 추하게 변했다. 비껴나가지 않는 시선을 인간 욕망 기제에다 꽂은 오스카 와일드의 비장함을 말해 준다. 인간의 악행이 그때그때 장부에 기록되듯 계산된다면 인간이 기대할 구원은 어디 있을까 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3. 밖으로 향한 시선

희망을 담고 있어야 인간의 예술인데 여기서 희망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고민해 본다. 영화는 그 구원의 가능성을 아주 가까운 데서 보여 준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영혼들이 보여 줄 수 있는 눈빛을 통해 암시한다. 도리언 그레이의 눈빛이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나르시스의 시선이라면 첫 연인 시빌의 호소하는 눈빛은 상대를 향해 있다.

남의 호소를 거부한 도리언 그레이는 당시 대도시 영혼의 쾌락과 이중성을 대변하는 사교계에서 한 세상 보내고 긴 여행을 떠났다. 세월이 지나 돌아온 런던. 여전히 젊은 모습의 도리언에게 관심 갖는 여성 에밀의 시선 또한 상대에 대한 직설적인 관심이다. 에밀이 사진기를 즐겨 만진다는 것 또한 관념과 자기도취에 빠진 자아가 아닌, 바깥으로 향한 눈길을 뜻한다.

동상이몽격의 온갖 의미가 덕지덕지 붙은 사랑이란 의미는 여기서 적절하지 않겠다. 이 시선에는 아도르노가 말한 그 '은혜'의 가능성이 더 어울린다. 그건, 무심한 듯 그냥 보내는 관심과 시선이 주는 희망이다.

공포 영화로 분류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또한 바로 그런 희망 한 줄을 배제하지 않고 나즈막이 마지막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에밀의 순진한 관심이 영원한 젊음에 지쳐 있는 도리언 그레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

4. 공짜는 없다

은혜가 아니라면 공짜는 없다. 이웃의 애절한 목소리를 무시해 버린 나르시스의 비극은 에코를 물 속으로 뛰어들게 할 뿐 아니라 자신마저 딛고 선 바닥을 잃게 만든다는 집단 체험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었다. 대도시의 발흥과 함께 혼란스러워지고 거만해진 자아는 더 적극적으로 타자의 불행을 강요했다. 불평등한 계약과 결재의 질서 아래서 남의 피를 빨아 목숨(?)를 부지하는 흡혈귀의 쿨(cool)한 문화, 거만한 문화로 이어졌다. 흡혈귀는 보통 인간이 저항할 수 있는 선을 넘어 덮쳐 왔다.

흑백 영화 시대 이래 거듭 다시 유행하는 흡혈귀 모티브. 지난 세기 90년대부터는 뱀파이어(밤피어)란 이름으로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액자소설처럼 볼 때, 도리언이 악행을 저지르며 쿨한 쾌락을 맛보는 부분은 바로 흡혈귀 문화의 거만함을 은유한다. 당신의 젊음을 확인해 주는 초상화가 당신 대신 늙어 주기를 원한다는 발상은 물론 작가의 발상이지만 이는 동시에 우리 속에 사회화된 욕망 기제를 보여주는 설정이다. 가능하면 덜 힘들고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싶고 공짜로 지배하고 싶고 세월이 가도 늙고 싶지 않은 욕망이 아직도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세상. 자연 앞에서 공짜를 바라며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 관계를 파괴한 인간사가 도리언 그레이의 비극에 그림자처럼 스친다.

그렇지만 흡혈귀의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영화가 재미 없다는 것도 현실이다. 악마도 사기 당하는 것이 사람 사는 동네였다. 흡혈귀도 언젠가는 정산을 하는 것이 꿈의 공장이다.

변화되지 않은 인간들이 탄 욕망의 전차를 바라본 아일랜드 작가가 도리언 그레이를 처음 발표한지 120년이 되었지만 영화의 진술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메트로폴을 태동시킨 19세기 후반의 새로움이 수차의 경제위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낡음이 되었고 다른 새로움으로 바뀌어야 하지만 지구는 여전히 아직 그 낡음을 붙잡고 있다. 힘 셀 수록 공짜를 챙길 수 있는 세상은 사람이 새로움을 찾을 때에만 무너진다는 희망 또한 여전하다. 도리언 그레이마저 종국에 가선 자신이 누린 영원한 젊음을 회의한 걸 보면 공룡들도 언젠가는 새로움을 찾고 싶지 않을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올해
415일 독일 전역에 개봉했다. 독일 내 배급사 콩코르드의 620일자 집계에 따르면 125866 명의 관객을 불러 들였다. 배급사측은 문학을 영화한 경우 흥행이 어려운 것이 보통이며 더욱이 아일랜드 사람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세계는 일반인들이 까다롭게 여겨 거리를 둔다는 점을 감안하자면 성공적인 결과라고 평가한다.

도리언 역을 맡은 벤 반스(Ben Barnes)는 나니아 연대기 2편 케스피언 왕자(영국/미국 2009, 145)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3편 새벽출정호의 항해(영국 2010 12월 개봉 예정)에도 주연으로 나온다. 잘 생겨서 인기가 좋은 것 같다. 위험한 카리스마의 헨리 워튼 경 역은 콜린 피르트가 맡았다.

영화는 올리버 파커 감독이 오스카 와일드의 동명 소설로 만든 세번째 영화로서 영국 영화사를 빛나게 했다. 112. 16세부터 관람가. 독일어 제목: Das Bildnis des Dorian Gray (112).

Dvd & Blue-ray Disc

출시 예정: 201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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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7호 / 8월 1일]

사진: concorde.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