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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고 싶었던 사진사 "유르겐 힌츠페터"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고 싶었던 사진사

푸른눈의 목격자” 유르겐 힌츠페터

그때 내게 중요했던 것은 상황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었다”


유르겐 힌츠페터. 1937년생. 라체부르크 시골의사 부부의 아들. 학교 다닐 때는 청년기민당 활동을 잠시 했다. 대학에서는 유르겐은 방송국 사진기자 일을 하며 생활비를 보충했다. 기자로 파견될 일이 있으면서 의학공부를 그만두었다. 병역거부자였힌츠페터 베트남을 비롯 전쟁지역을 다녔다.

1973년부터 1989년까지 ARD/NDR 아시아 담당 영상저널리스트로 토쿄에 있던 힌츠페터 기자가 당시 '광주 학살''광주 항쟁'을 담은 영상을 세상에 알렸다. 당시 국내신문은 광주를 두고 “북괴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반란”이라든가 "군대가 잘 대처하여 최소한의 희생"(조선일보)”을 치뤘다는 식으로 보도했지만 힌츠페터의 영상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됐다. 국내에서는 “푸른눈의 목격자”란 별명을 얻었다. 2003년 송건호 언론상을 받았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현장을 지켰던 치열한 기자정신이 국민의 양심을 깨워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겼다”는 것이 수상이유였다. 다음은 5월을 앞두고 힌츠페터와 풍경이 나눈 대화.

'한국' 소식을 자주 듣는가?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매일 접한다. 아리랑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저녁에는 뉴스도 본다. 한국은 매우 아름다운 나라다. 서구식 복장을 하면서도 전통적인 것을 잘 가꾸고 있다. 한국문화가 참 아름답다. 옛날식 장이라든가 못 안 쓰고 집 짓는 것이라든가 옛 궁궐 같은 것 말이다. 한국 춤, 추석 축제, 불고기...... , 개고기도 먹어 봤다...... 그리고 김치도 빠질 수 없지....... 작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셨지. 장례식에 못 가서 안타까웠다. 일본으로 도망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고...... 고생이 많은 분이었다. 한겨레를 통해 조문을 보냈다.

30년 전 광주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나?

토쿄에 한국의 게엄령 소식을 들었다. 대통령이 죽고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피어나고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을 때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침 윗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보도결정의 책임을 졌다. 본사에 상황을 보고하고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미리 연락된 안내자와 함께 광주로 들어가는데 진입로에 탱크가 있었다. 들어갈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샛길을 찾아 광주로 들어갔다.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무리가 있었다. 우리를 보고 반가워했다. 우리도 트럭을 함께 탔다. 그때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광주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무척 반가워하고 환호했다.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상황에서 외국인이 나타나니 자기들의 상황이 바깥에 알려지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사람들은 나즈막히 애국가를 불렀다.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몇 사람이나 죽고 부상했는지 전체 상황을 알기 힘들었다.

그때 촬영자료를 빼돌리게 된 사정은?

갖고 있으면 빼앗길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혼케이크 상자 속에 넣어 토쿄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토쿄에서는 스튜디오에 있는 조수에게 줬다. 자료를 전달하고 바로 다시 광주로 들어왔다. 나중에 또 한 번 더 촬영자료를 반출했다.

토쿄에서는 바로 루프트한자로 자료를 함부르크로 보냈다. 함부르크에서는 슈테른으로 보냈다. 잡지 슈테른이 아니라 무선 발신국 슈테른이다. 이 슈테른 발신국에서 우리 촬영자료를 전세계로 보냈다. 한 열흘간은 세계가 거의 이 영상에 집중했다.


국내 체류하는 동안 정보기관이 감시했다고 생각하나?


우리 방을 도청할 수 있다는 것을 늘 의식했다. 우리처럼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방에서 대화하지 않았다. 감시당할 수도 있다는 것은 계산해야 했다. 밖으로 나가서 산책하며 이야기했다. 통상 한국에 입국할 때 출입국 관리소에서 저널리스트로 등록을 해야 했다.

하지만 우린 805월에 광주로 들어갈 때는 저널리스트 등록을 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출입국 관리소에서 기자 등록을 했다면 우린 그 자리서 입국 거부를 당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글쎄. 그건 그리 의식하 않았다. 당시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 상황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었다. 특히 독일이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 바로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있다는 것, 시민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게 중요했다. 사람이 총에 맞아 죽은 것을 알려야 했다. 그 장면은 내 촬영 자료에도 들어 있다.

독일에서 사람이 죽고 얼굴에 총을 맞아 피 흘리는 장면 보는 것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나도 지금 그때 그 장면을 생각하면 소름 끼친다. 그렇지만 그 영상은 너무 생생하여 국제사회를 들끓게 했다.

그해 9월 군사법정이 김대중에게 내란 혐의를 덮어씌워 사형을 선고했을 때 여기서 우리는 사흘 밤을 꼬박 새며 당시 자료를 사용하여 45분짜리 다큐를 만들었다. 김대중이 그 전라남도 모퉁이 출신이고 친척들이 거기 산다는 이유로, 김대중이 늘 반대를 해 왔다는 이유로, 옳은 반대였지만, 그를 싫어하던 사람들은 죄를 덮어씌울 사람을 찾다가 그에게 덮어씌운 터였다. 우리가 만든 다큐는 그때 김대중 구명운동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든 다큐영상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카나다 미국까지 갔다.

오늘날도 그런 비슷한 일이 있으면 그때와 같이 행동할 것인가?

그동안 본성은 바뀌지 않았다. 오늘날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사람의 자유와 존엄이 위협받는 것을 보면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조금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난 경찰에 얻어맞아 다친 적이 있다.

86년이었다. 서울 광화문에서 시위현장을 찍는데 군인이 와서 카메라를 팽개치고 나를 때렸다. 나이가 들면서 전에 다친 곳에 통증이 심해졌다. 매일 잠들 때나 일어날 때 심하다. 척추와 허리가 아프다. 일전에 아홉시간 반이나 걸려 수술한 적이 있다. 수술하는 게 좋을지 아닐지 몰라 망설이다 했는데 통증이 너무 심하다. 귀도 아프다. 내일은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가야한다.

사진을 찍기 시작할 때는 어떤 꿈을 가졌나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사진반에 있었다. 포토길드 반장이었다. 자그마한 사진기를 갖고 있다가 렌즈 카메라를 처음 받았을 때 너무 좋았다.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고 싶었다. 아름답고 표현력 있는 사진 말이다. 그렇지만 사진은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어디서 어떤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라 하겠다. ye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