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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베를린 베벨광장의 빈 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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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베벨광장의 빈 책장


그때 그 '정화작업' 아래 불타오르는 책들을 방관한 기억


베를린 운터 덴 린덴. '보리수 아래서'란 낭만적인 이름이 붙은 이 거리에 접한 베벨 광장에서 책이 불타오른 시간이 있었다. 1933510일 독일 파시즘 정권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연설하며 독려했다 “더러운 정신들을 불 속으로 던져라”는 음울한 선전에 취해 청년들이 책을 불 속으로 던졌다. „11월 공화국을 파괴하고 불사조가 날아오르리라”는 주술과 함께 불이 타올랐다. 그 해 3월에서 10월까지 독일 전역 70여 개 도시에서 분서사건이 있었다. 학생들이 함께했다. 분서대상이 된 책은 정치 서적 뿐 아니라 정신분석학, 역사서적, 철학, 교육, 종교, 일반문학 모든 분야에 걸쳤다. 정치와 생활과 문화와 사람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괴벨스는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칼 막스, 하인리히 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에리히 케스터너, 칼 폰 오시스키, 쿠르트 투홀스키, 레온하르트 프랑크, 막심 고리키 등 파시즘 독일의 불도저 정치에 방해 될 정신은 모두 불태우려는 소위 '정화작업'이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분서 사건 전에 작성된 블랙리스트 목록에 들어 있다. 지역에 따라 리스트는 조금씩 다르지만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 리차드 베르 호프만, 하인리히 하이네도 분서의 불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한국인들도 즐겨부르는 노래 '로렐라이'의 가사가 된 시를 하이네가 썼으나 그 노래를 금지할 수 없었던 독일은 그만 '로렐라이'의 가사를 '작자미상'이라고 하며 하이네의 이름을 대중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발터 벤야민, 베르톨드 브레히트, 프란츠 베르펠, 슈테판 츠바이크 등도 금지됐다. 발터 벤야민은 해외망명을 시도하다 포르트 부에서 자결하고 베르톨드 브레히트는 본인 스스로 표현에 따르면 “빵을 벌어들이기 위해 거짓말을 팔아먹는 시장” 헐리우드로 갔다.

현대독일동화의 전통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에리히 케스트너는 그때 그 분서사건을 두고 이렇게 기술했다.

금지된 작가가 된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 책방에서 자기 책을 볼 수 없다는 것. 조국의 어떤 도시에서도 보이지 않고 고향도시에서마저 보이지 않다는 사실.“

1899년생 브레히트는 '분서사건'이란 시에서 '내 책을 왜 태우지 않는가, 나는 진리를 말하지 않았단 말인가? 나도 태워라' 하고 분노의 목소리를 울렸다.

독일언론은 침묵했다. 대부분 긍정적인 보도였고 기껏해야 가상의 중립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위키페디아에서 볼 수 있는 소련의 프라우다 만평에선 그 분서사건을 중세때 마녀재판에 비유했다. 담 너머에서 화형장의 장작더미쪽으로 교황이 손을 내미는 장면을 만평에 담았다. 10년 전의 실패한 정변 시도 이후 그해 정상적인 의회절차를 거쳐 정권을 잡은 히틀러 파시즘은 봄을 그렇게 시작했다. 그 정권이 패망하기까지 12년이 걸렸다. 많은 시민들이 파시즘의 선전에 마취되거나 열광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12년이 시작할 때 많은 시민들이 방관한 덕분이기도 하다.

2010년 지금 베를린 운터 덴 린덴. 베벨 광장 건너편에 자리한 훔볼트 대학으로 들어가면 칼 막스의 명언이 걸려 있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했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대학 마당에는 노점책방이 열려 있다. 동독시절에 출판한 듯한 요셉 로트의 책이 싸게 팔리고 있다. 건너편 베벨 광장의 책장은 비어 있다. 책장은 광장 한가운데 투명한 뚜껑 아래 서 있다. 하늘이 맑아 그곳에는 책이 없다는 사실은 몸을 숙이고 들여다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베를린 사람들은 그렇게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자유도시의 전통'을 자랑하는 마인강변 프랑크푸르트에선 시청 앞 뢰머 광장에도 그들이 분서 광란을 치룬 자리에 표식이 남아 있다. 뮌헨의 분서장소는 쾨니히스 광장이었다. 기원전 213년에 진시황이 죽기 3년 전에 치룬 분서 사건이 20세기 독일에서도 반복됐다. 진시황은 철학책만 태웠지만 괴벨스는 이야기책까지 태웠다.

책을 불태운 권력은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아직 다 죽지 않은 사람을 다시 불 속에 던지는”(아도르노) 범죄까지 저질르고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가 가능한가?” (아도르노) 하는 아픈 화두를 남겼다. 분서사건은 패망을 향해 질주하는 권력이 그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시작이었지만 제때 막아내지 못하였으므로 독일은 그 방관의 후윳증을 오래 겪어야 했다. 파시즘 독일은 고향 노래를 부르며 겉으로는 번드르르했으나 결국 패전 후 수십년 후손들에게까지 그 범죄의 그늘 아래 살게 했다.

사람들은 분서사건을 기억하며 하이네의 희곡에 나오는 대사를 종종 인용한다.

그건 단지 서곡일 뿐이오. 책을 태우는 자들이 마지막엔 사람까지 태울 것이오”

이 구절을 두고 예언자적이라 하지만 출처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하이네의 그 말은 온전히 이해되지 못했다. 이 구절은 1821년에 발표한 하이네의 희곡 '알만조르'. 주인공 알만조르가 '광장 한가운데서 코란을 불 속에 던져넣는 소리를 듣는다' 하자 하산이 대꾸한 말이다. 정치적 불관용 뿐 아니라 종교적 문화적 불관용에 대한 경계의 뜻을 지녔다. 유태인으로서 변호사 활동을 위해 기독교로 개종한 하이네는 자신의 개종을 두고 “서구문화에 들어서기 위한 입장권”이라고 자조한 바 있다. 개종은 했으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불관용이 싫었던 것은 당연하다.

하이네가 예언적인 구절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하이네의 시대에 이미 그 분서사건을 향한 독소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집단의 광란은 하루아침에 독재자의 자기도취와 광란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방관하는 이들의 집단문화에 깔린 불관용과 이기주의 정신이 키운 것이었다. 한 사람 두 사람이 생각의 자유를 차단당할 때 집단의 광기를 지지하며 사상경찰의 흉내를 낼 때마다 화형장의 책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독일 목사 마틴 니묄러의 명언은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또한번 경종을 울린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를 잡아갈 때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유태인을 잡아갈 때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난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잡아갈 땐 아무도 나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베를린 베벨 광장의 빈 책장은 사람의 문화가 파괴되는 것이 특정 문화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적인 가해자는 물론 방관자와 그 후손에게 무거운 책임감과 후윳증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는 점을 묵묵히 보여준다.


(사진: 볼트 대학 건너편 베벨 광장 지하로 들어간 빈 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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