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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백남기] 온유하며 강인한 사람

- 딸 백민주화가 본 아버지 백남기 -


천주교 부산교구 김인한 신부는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가 생사를 오가며 누워있는 침상이 이 시대의 구유“(전국농민회총연맹 홈페이지 .ijunnong.net)라고 하였다.

11월 14일 경찰의 살인진압으로 자리에 누운 백남기 씨 자녀 1남2녀 중 막내딸 백민주화 씨(29)는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다. 귀국하여 아버지 옆에 있다가 성탄절을 앞두고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딸 백민주화 씨에 따르면 아버지는 배려와 양보가 몸에 배어 있고 아이들을 좋아하신 분이었다. 내년 칠순을 맞아서는 바티칸을 갔다가 유럽으로 효도여행을 할 계획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운 기도가 하늘에 닿아 쾌차하여 바티칸 여행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딸과 나눈 이야기를 여기에 옮긴다. (편집 주)



사진출처: 한국천연염색 공예관 블루코리아 황수환



- 떠나오니 많이 서운하였겠습니다.

백민주화: 예. 하루에도 여러 번 기도해요. 떠날 때 마음이 힘들었지만 아버지는 제가 지오 놔두고 아버지 옆에 있는 걸 더 불편해 하셨을 거예요.
아버지는 평생 매일 기도하며 사셨어요. 산책하실 때나 주무시기 전이나 수시로.

- 아버지가 가톨릭 농민회 들어가신 해에 태어나셨군요. 딸이 보기에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백민주화: 배려와 양보가 몸에 배어있는 분, 욕심이 거의 없는 분이셔요.
사실 그게 멋있고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존경받아 마땅한 삶의 자세지만 아빠로서 더 욕심부리고 사셨어도 됐었죠.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서. 하지만 성품이 그러하시니 가족들이 다 아빠는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아이들을 좋아하셨어요. 자식 셋 모두 똑같이 사랑해 주셔서 차별이나 편애 같은 건 1퍼센트도 느껴본 적이 없었고요.
아빠는 손자 지오랑 하루종일 놀 수 있는 무한체력 할아버지예요. 지오랑 놀아주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아직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요. 아빠는 지오를 보며 자신이 다시 태어난 느낌이라고까지 하셨어요.

원래 아이들을 이뻐하시는데 육십후반에 손주 보셨으니 얼마나 행복하셨겠어요. 결혼도 늦게 하셔서 친구분들보다 손주를 늦게 보셨죠.
저희 셋 백일사진이 아직도 안방에 한가운데 걸려 있어요. 지오 8개월 때 찍은 사진도 걸려 있어요. 엄마 이모 삼촌 백일사진 옆에 더 많이 자란 지오 사진이 걸려있는 거에요.

- 꾸중 들어본 적도 없겠군요.

백민주화: 있어요. 일기랑 독후감을 꾸준히 써야 했는데 빼먹거나 크게 밀리면 셋이 같이 맞았어요. 하나가 잘못해도 셋이 똑같이. 나이대로 맞았어요. 하지만 우리가 중학생이 된 후로는 매를 안 드셨어요.

사교육은 무조건 반대하셔서 직접 영어를 가르쳐 주셨어요. 작은 학교이긴 하지만 셋 다 전교 1등 했어요. 고등학교 진학 문제에선 우리 의사를 존중해 주셨어요. 셋 다 각자 원하는 곳에 지원해서 갔어요.

중학교 때 저 영어 직접 가르치신다는 소문이 나서 2년 무료 과외를 하시기도 했어요. 친구들이랑 같이 과외를 하게 되고 나중에는 다른 학년까지 그룹지도를 하시게 되었어요.

- 언제쯤 아버지가 사실은 욕심을 좀 더 부리고 사셔도 된다고 느꼈나요?

백민주화: 중고등학생 때 느꼈죠. 아이 셋을 키우는 게 사실 보통일이 아닌데 쌀이나 밀농사만으로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워낙 시골일이 힘든 걸 아니까 자식들이 그런 걸 불평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어요.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이런저런 행사가 있으면 꼭 수육과 동동주를 직접 만들어 가시곤 했는데 엄마가 많이 고생하셨을 거에요. 하지만 두 분 다 그렇게 나누는 걸 좋아해서 그게 힘들다고 생각하시진 않았을 거예요.

- 신념과 행실이 일치하시고 이웃에 감화력 높은 지도자라는 생각이 드네요.

맞아요. 아빠는 그런 분이예요. 아빠의 교육관이나 실제 교육내용은 고등학교 가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구요. 사실 그걸로 고등학교 3년을 버틴 것 같기도 해요. 그만큼 아빠의 정성을 크게 받아들인 거 같아요.

아빠가 다치기 며칠 전 십 년도 더 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대요. 누군가가 아빠가 하지도 않은 일을 오해한 적이 있었는데 아니라고 하고 넘어갔지만 십 년이 지나서까지 그게 맘에 걸려있는 거에요.

그만큼 솔직하고 정직하세요. 엄마가 다른 건 몰라도 도덕점수 99점 준다고 평생 말씀하지지요. 그게 아빠랑 사는 이유아니겠냐며.

- 어머님 건강은 어떠세요.

백민주화: 괜찮으세요. 기운이 없으시지만 식사랑은 잘 드시고 계세요. 충격이 너무 커요. 아빠가 사실 69세인데 너무 젊잖아요. 할아버지지만 많이 건강하셨어요. 엄마가 걱정이 많이 돼요.

저는 산타를 10살이 되도록 믿었어요. 애들이 그걸 믿냐고 놀렸는데 끝까지 믿었어요. 크리스마스 트리에 산타에게 쓰는 편지를 걸어두면 다음 날 원하는 선물이 꼭 있었어요. 일찍 산타 존재를 알아 챈 언니오빠도 날 위해서 몇년을 모른척 해줬어요.

- 부모님이 완벽하게 산타 작전을 쓰셨나 보군요. 어떤 선물들을 받았나요?

백민주화: 신발도 있었고 목도리 장갑도 있었고. 서태지 옷도 있었고. 서태지 사진이 프린팅된 보라색 트레이닝복 세트 받고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기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네요.
나중에 만원짜리가 놓여있어서 희망이 이루어지는 그 맛을 유지하는 환상은 끝났어요. 클만큼 컸다는 뜻이기도 하고.
많이 못해줘서 미안하다며 경운기 태우고 읍내에 가서 인형 하나씩 사 주신 적이 있어요. 차가 없을 때이니까.

- 가족에게도 참 다정하셨군요.

백민주화: 아빠는 무녀독남 외아들이에요. 그러니 학생운동하다 감옥에 가셨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 심려가 얼마나 어마어마했겠어요.

할머니께서 면회가셨을 때 자술서 같은 거 써라 그럼 일찍 나온단다고 하니 그 자리서 입 꽉 다물고 다시 감방으로 들어가버렸대요. 그래서 할머니가 다음날 다시 찾아가서 그런 말 절대 안 한다고 약속하니 그제서야 몇 마디 하셨대요. 

아버지는 온유하면서도 강인한 분이셔요.

그때 감방은 벽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대요. 아빤 냉수마찰하고 그러셨대요. 아빠를 무척 사랑하는 이모 할머니가 해 주신 이야기라고 서울에 있는 언니가 얘기해 주었어요. 아빠 다치기 며칠 전 칠십 다 된 조카에게 생활한복 사서 보내신 아빠 이모요.

할머니는 한스러워하셨대요.

“똑똑한 놈이라 내가 장관은 바라봤다. 근데 운동하다가 쫓겨나서 농사지으러 고향으로 돌아왔느냐.”

똑똑한 외아들이라 기대가 큰 만큼 마음고생도 많이 하셨을 거예요.

- 아버지는 장관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거예요.

백민주화: 아빠는 누가 알아봐주는 걸 제일 불편해 하세요. 누가 칭찬을 하거나 하면 진심으로 손사래치며 말해요.

“그러려고 한 일 아니다. 당연한 일을 한거다.”

입에 배어 있죠. “

“당연한 일을 한 것인디…… 그러디 마소”

딱 이말. 아마 의식이 있으셨다면 지금 상황 많이 싫어하실거에요..

- 아이를 키우면서 아빠에게 받은 교육을 적용할 때가 있나요?

백민주화: 음…… 지금은 아이가 너무 어리긴 하지만 사랑을 듬뿍주자 생각하면서 키우는데 다만 쓸데없이 우는 것엔 많이 엄해요. 생각해보니 우리 셋이 이유없이 땡깡부리는 것에 아버지는 매우 엄하셨어요.

그걸 제가 하고 있는 거 같아요. 의도적인 건 아닌데 어느 순간 보니 그러고 있네요.

- 우리가 부모님에게서 나왔지만 부모님이 또 우리 속에 영원히 사신다고나 할까요.

백민주화: 예 정말 그래요.

- 쾌차하시면 무엇을 해드리고 싶으세요?

백민주화: 내년에 바티칸에 가기로 했어요. 칠순기념여행을 보내 드리기로 했거든요. 로마에 갔다가 스위스 프랑스 경치 좀 보여 드리고 싶어요. 또 지오(백민주화 씨 아들)랑 시간 많이 보냈으면 좋겠어요.



사진출처: 한국천연염색 공예관 블루코리아 황수환


인터뷰 기자: 이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