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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풍경 22호 4면] 상처입은 용의 승천

-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 기일 (11월 3일)을 기해 -


1917년. 아가는 어머니 김순달의 꿈 속에서 지리산을 감싼 용이었다. 용은 지리산을 떠나 먼 곳으로 갔다. 고향 음악의 신비를 안고 간 그 곳에서 납치를 당했다. 먼나라 예술가 동료와 정치인들이 나서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했다.

다시 독일로 오기는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추방'이라는 모욕적인 처우를 했다. 더 모욕적인 것은 그의 음악을 대한민국에서 연주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상처입은 용'은 결국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독일에서는 '앙상블 모던' 같은 국제적인 최상의 실내악단이 윤이상을 연주할 정도로 인정받은 음악가이지만 국내에서는 그렇게 모욕을 주었다. 그의 음악은 90년대가 되어서야 서울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예술가에게 모욕을 준 역사는 아직도 온전히 청산되지 않았다. 


산청에서 서울까지

윤이상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 하는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상업학교에 입학하면 음악을 해도 좋다'고 허락을 해 주었다. 1935년에 오사카 상업학교를 다니면서 오사카 음악학원을 다녔다. 

열여덟살부터 마흔까지 윤이상은 서구음악의 최첨단을 향해 달려가던 음악인이었다. 서울에서 만난 군악대 바이올린 주자를 통해 화성학을 배웠고 일본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교육자로서 윤이상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곡했다. 1937년 고향 화양학원(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는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내고, 광복 후에는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 교가를 작곡했다. 1948년 이후에는 통영과 부산에서 교사로 일했다. 가곡집 '달무리'를 출판했다. 1954년에는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윤이상은 음악교육 뿐 아니라 음악인 조직을 통한 사회활동도 왕성하게 했다. 해방 직후에는 유치환, 김춘수 등 통영 예술인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구축하고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의 '전시작곡가협회'에서 일하고 한국전쟁 후에는 '한국작곡가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작곡 뿐 아니가 음악에 관한 이론글도 썼다.

다른한편 윤이상은 음악가가 아니라 한 시대를 적극적으로 살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저항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고 경찰을 피해 다니고, 전쟁고아 이야기를 듣고는 부산시립고아원 소장이 되기도 했다.


마흔에 떠난 긴 여행

마흔이었다. 1956년 파리, 1957년 베를린, 1958년 다름슈타트.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는 세기의 천재예술가 존 케이지와 백남준을 만난다. 베를린에서는 쇤베르크의 제가 요셉 루퍼를 만나 작곡을 공부했다. 그가 더 배우고 싶었던 서구현대음악의 '12음계법' 뿐 아니라 국제 아방가르드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음악을 찾아서, 자신의 음악세계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유럽으로 왔고 명실공히 그렇게 동양과 서양을 자신의 음악세계에 접맥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5년에는 '옴 마니 파드메 훔'(om mani padme hum, '옴, 연꽃 속에 있는 보석이여, 훔'이란 뜻, 재앙과 질병에서 관세음보살이 지켜주고 성불하거나 큰 자비를 얻는다는 믿음이 담긴 말)으로, 1966년에는 도나우에슁엔 음악제에서 례악(Reak)을 초연하여 국제음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부하고 싶던 것을 공부하였고 그 결과물로 국제작곡계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지리산을 휘감고 태어난 용이 유럽에서 동서양의 만남을 음악으로 체현하며 승천하는 이즈음 먹구름이 덮쳤다. 


박정희 정권의 국제사회 스캔들

1967년 동백림 스캔들. 1967년 7월 8일자 동아일보에 '북괴대남사건간첩발표'라고 한문으로 대문짝하게 제목을 쓴 기사에 따르면 사건 혐의자는 194명. 

50세 윤이상은 '재서독음악가, 전서독한인회장'이라 되어 있다. 194명에 대한 혐의사실은 1958년부터 구성되어 있으며 서독 땅에서 이른바 '혐의자'를 납치해 온 것에 대해 '김 정보부장'(이하 김형욱)은 공군기를 사용하지 않고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왔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물론 문제가 없지 않았다. 동백림 사건을 기억하는 독일 지성인들은 그 사건을 두고 '임의동행'이라 하지 않고 '납치'라고 한다. 동백림 간첩단 조작사건 혹은 베를린 스캔들(Affaere)은 박정희를 독재자로 온천하에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같은 해 12월 선거 공판에서 조영수, 정규명 2명에게 사형, 정하룡, 강빈구, 윤이상, 어준에게 무기징역, 그외 28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렸다.

예술가와 학자들을 대거 간첩단으로 몬 이 사건은 김형욱의 자신감과는 달리 독일여론을 들끓게 했다. 당시 사건 발표 보도에 따르면 김형욱은 독일에서 문제를 삼는 사람들은 '북괴의 조종'을 받고 하는 것이라 하였지만, 슈톡하우젠, 헨체 같은 세기에 이름을 남기는 작곡가들이 포함되어 2백여 명이 연대서명한 구명운동은 김형욱의 선전을 무색하게 했다.


초대 재독한인회장 윤이상

윤이상이 북에 가서 친구를 만난 것이 문제가 되었다 하나 그 사이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고구려 고분 '강서대묘' 방문이 윤이상에게 중요한 체험이 되었다. 


“선생은 동백림 사건으로 인해 구속된 이후 자살을 생각할 만큼의 혹독한 취조과정에서도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를 연상한 작품 ‘연상’을 구상하고 복역 중에 작곡을 마쳤으며, 훗날 이 작품은 플루트·오보에·바이올린·첼로의 4중주로 연주되며 현재 윤이상 음악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2004년 8월 10일자 법보신문,  부인 이수자 여사와의 인터뷰)


그러나 놀랍게도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윤이상이 재독한인회의 초대회장이었다는 사실이다. 독일전역에 30개가 넘으며 재독한인연합회는 이 한인회들의 상위집단인데 이 한인연합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초대회장이 윤이상이다. 

일제강점기때나 해방 후나 전쟁때나 시대에 따라 음악인으로서 뿐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삶을 살았고 독일생활에서도 한인사회가 시작하던 60년대 진취적인 초대 한인회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는 윤이상이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일관성 있게 보여 준다. 이러한 애정 때문에 그의 삶이 더 고난 을 겪었다. 자신을 예술의 온실 속에 가두어 두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먹구름과 폭풍우로 내몰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러한 삶이 동시에 예술의 깊이를 더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윤이상은 예술의 미와 정치현실의 지저분함을 가능하면 분리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고국의 운명에 대한 근심, 평화를 위한 앙가주망, 자유를 향한 동경과 해방이 그의 음악에 울림으로 남는다" (발터 볼프강 슈파러 Isang-Yun(1917-1995) CD 부클렛에 쓴 글에서)


고국에 대한 근심은 광주항쟁을 소재로 하여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Kwangju, 1981)'를 쓰게 했다. 정유하는 이를 '항쟁의 고발과 투쟁에의 예고를 표현한 교향시'(네이버 블로그 518음악동네, 5.18 항쟁의 형상화에 사용된 음악양식)로 분류했다.


윤이상은 루이제 린저가 쓴 '상처입은 용' 모국어판 서문에서 


“정치 이데올로기는 길게 보면 활엽수처럼 계절에 따라 무성하고, 착색되고, 낙엽이 지는 것이지만, 민족은 창공처럼 엄숙하고 영원한 것이다”(인터넷한겨레 3월 23일자)

고 했다. 


윤이상의 생애와 음악이 지니는 신비로움은 바로 그러한 '엄숙하고 영원한 것' 때문이라 하겠다.


(풍경 2011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