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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윤이상이 말한다 입북 권유라니...... 오길남 탈북 후 처음 만나

윤이상이 말한다 입북 권유라니......

오길남 탈북 후 처음 만나

'사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고 윤이상이 말한다. 1992년 5월 오길남의 주장에 대해 반박한 글로 한인회보에 내기 위해 쓴 글을 국제 윤이상 협회에서 이번에 공개했다. 

올여름부터 생전에 윤이상 선생을 아는 한인들에게 가슴아프고 민망한 사건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는 독일 신문이 대문짝만하게 오길남 이야기를 실었다. 가족을 데리고 입북하였다가 탈북한 오길남이 북에 두고 온 가족 구출 작전을 독일 사회에서 벌이면서 윤이상 선생의 권유로 입북했다는 주장을 반복한 내용은 몇 달 전 베를린 한인회보에도 실렸다. 
베를린 한인회보는 이른바 ''통영의 딸' 즉 오길남의 가족을 살리자는  슬로건을 함께 담았다. 오길남은 또 베를린과 그 외 독일 도시를 순회하며 강연을 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가족살리기 사업'인지 '윤이상 죽이기 사업'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라고 지적하고 있다.
 
오길남은 대한민국에서 무척 들어가기 어렵다는 대학교를 나온 사람으로서 1985년 입북하여 그곳 선전원으로 일하다가 코펜하겐을 거쳐 탈북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입북하게 된 이유에 대해 누구누구가 자신에게 권유하였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거기 지목되는 사람은 반공주의 사회에서 부당하게 유리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그  누구누구에 언급된 사람은 송두율, 윤이상이 있었고 또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예술인이 있었다. 
 
당시 정황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겪은 동포들도  오길남을 두고, '제 발로 걸어가 놓고 무책임하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핑게를 대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며 일축하는 한편 고인의 명예에 흠집 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일일이 대응하면 진흙탕 싸움'이라면서 답답함을 추스리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일상적인 반공 반북주의를 거부할 계기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오길남 스토리는 무척 흥미진진했던 것 같다. 하지만 흥미진진하다고 하기에는 민망한 이 스토리가 윤이상의 편지 공개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일전에 오길남이 송두율 교수를 입북 권유자로 지목했을 때는 송두율 교수 변호인이 이를 반박하여 한동안 잠잠하였으나ㅏ 이제 윤이상 선생의 기록은 오길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윤이상은 어떤 국제회의에서 오길남을 먼발치에서 보았으나 정작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오길남이 탈북한 후다. 그것도 오길남이 1986년 탈북 후 몇 달 있다가 윤이상을 바로 찾아 왔다는 점도 기록되어 있다.  
 
오길남은 윤이상을 찾아와 가족을 찾는 것을 도와 달라 부탁했던 것이다. 인정받는 세계적 음악인으로 북과 소통의 통로가 있던 윤이상이 오길남을 위해 북에 청을 넣은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윤이상의 편지는 또 오길남 가족의 안부를 알아보고 사진을 갖고 온 것도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오길남이 자신의 가족 사진을 보며 진지한 감흥이 없었던 점에 대해 윤이상이 실망한 기억도 있다. 
 
이번에 공개된 글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편지 마지막 부분에 윤이상 선생이 헐뜯는 시도를 지적하며 중단할 것을 요청하고 또 이 사태를 당시 '국내 대통령 선거 사건과 연관지어 행하는 모략'으로 분석하여 완곡하게 지적한 일이다. 
"[...] 따위는 전적으로 정치 조작이며 이 이면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엄청난 모략이 숨어 있는 것이 짐작된다"

이런 분노에도 불구하고 기록은 결국 윤이상 선생의 삶의 지향을 읽을 수 있는 글로 마무리된다. 

"나는 분단된 민족의 비극으로 인하여 한국으로부터 나 자신이 모략과 악랄한 선전에 시달려 오고 있는 사람이기에, 내 능력이 다하는 데까지 부당하게 곤경에 빠져 있는 사람을 도우려고 노력해 왔다. 앞으로도 나는 정의를 위하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내 힘이 필요할 때에는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윤이상 죽이기' 망령이 '잃어버린 10년' 세월을 건너 왔으나, 죽은 윤이상이 산 오길남에게 말한다. 
 
yeh

(풍경 2011년 12월호)